마에스트로 앙헬 베니토 제자...'박윤아 기타' 구매 위해 1년 기다려야
“한국과 스페인 감성 모두 담은 기타 제작, 다채로운 표현 가능해”
연주자의 음악을 가장 잘 담아내는 악기 만들고파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Remeber me. For even if I'm far away I hold you in my heart”(날 기억해 주렴. 내가 멀리 있더라도 넌 나의 가슴속에 있단다.)
디즈니ㆍ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는 음악가라는 꿈과 그것을 반대하는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미구엘이 우연히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미구엘은 ‘죽은 자들의 날’에 전설적인 가수 에스네르토 델라 크루즈의 기타에 손을 댔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 전개에서 중요한 소재인 이 기타는 멕시코에서 기타를 만드는 장인으로 활동하는 살바도르 메자가 실제로 만들어 판매하던 기타다. 흰 바탕에 그려져 있는 해골 무늬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코코>가 전하는 메시지와도 맞아 떨어진다. 이처럼 악기는 소리 뿐만 아니라 제작가의 의도와 애정, 진심을 담는다.
스페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타 제작가 박윤아는 제작이 아닌 연주자로 기타를 시작했다. 만 16살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클래식 기타라는 악기를 접하고 평생의 동반자가 될 것을 직감했다는 그는 한국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후 스페인의 알리칸테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앙헬 베니또 아구아도를 만나 스페인 악기 제작 전반에 관한 기술을 배운다. 몇 년의 견습 기간 동안 20세기의 클래식기타 장인들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게 되고, 악기 수리법과 기타 구조에 대해 배운 후 본격적으로 악기 제작에 나섰다.
클래식 기타의 종주국답게 스페인에는 기타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장인, 루시어(luthier)의 수가 많지만 여성 루시어는 흔치 않고, 한국인 여성으로는 박윤아가 유일하다.
그는 스페인 최고의 권위지 El País에 마드리드의 클래식 기타 미래를 견고히하는 한국 루시어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지 언론은 기사를 통해 박윤아를 ‘가업을 이어받은 남성’이 대부분인 길드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글로 된 이름 석 자를 알린 뛰어난 장인이라 말한다. 스페인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악기를 만드는 동양인 특히 한국인을 본 적 없는 현지인들은 종종 그를 다른 국적으로 오해하곤 한다. 이에 박윤아 루시어는 작업실 입구에 태극기를 걸어뒀다.
기타를 소리 나는 가구라 말하는 그는 자신만의 철학과 개성을 담아 악기를 만들지만, 그것의 주인이 될 연주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스페인에 거주 중인 박윤아 루시어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심장에 가장 가까운 악기’ 기타가 음악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파동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앞으로 어떤 루시어로 기억되고 싶은지 들어봤다.
지난 5월에 스페인 유력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됐고, 극찬을 받았다. 축하드린다. 기사화 된 배경과 내용, 그에 대한 소감을 듣고 싶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스페인의 클래식 기타 제작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며, 장인들의 작업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세대 변화가 활발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젊은 여성 제작자를 흥미롭게 봐주신 것 같다.
우연히 나의 기타 제작 이야기를 알게 된 마드리드 로컬 신문 여성 기자로부터 연락이 와서 취재에 응했고, 기사가 나간 이후 스페인 El País 신문사와의 인터뷰까지 진행하게 됐다. 스페인 전역에 내가 하는 일을 알릴 수 있어 굉장히 감사했다. 기사가 나간 후 수제 기타 제작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보람되고 기쁘게 생각한다.
루시어(luthier)라는 직업이 생소한 이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 부탁한다.
루시어는 현악기를 제작ㆍ수리하는 장인을 말하는데, luthier는 악기 류트(lute)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luth’에서 유래했다. 원래 류트 제작가를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지금은 줄을 활로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 현을 퉁겨서 연주하는 탄현악기 구분 없이 대부분의 현악기 제작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다만, 나는 클래식 기타만 제작하고 있다.
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것으로 아는데 전공하게 된 계기와 클래식 기타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클래식 기타 이전에 일렉 기타를 먼저 배웠는데, 속한 그룹 없이 혼자 연습을 하다 보니 연주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꼈다. 그러다 우연히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는 친구의 연주를 듣게 됐는데, 양손으로 멜로디와 화음을 같이 쳐서 하나의 악기로 여러 성부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클래식 기타를 배우게 됐고 전공까지 하게 됐다.
클래식 기타는 악기와 심장을 가장 가깝게 붙여서 연주하기 때문에,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과 미세한 떨림까지 잘 전달될 수 있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기타를 만드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면서 늘 품고 있던 꿈에서 시작된 일이다. 항상 마음속으로만 지녔던 꿈들이 이곳(스페인)에서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2005년 기타의 고장인 스페인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내 손으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를 해보고 싶다는 꿈이 더 확고해졌다. 더불어, 스스로 판단하기에 연주자로서 혼자 무대를 이끌어가기엔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여러 제작가를 만나고 그들과 악기 제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제 꿈을 실현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악기를 만드는 일이 대부분 가족 단위로 이뤄지고 가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외부인인 나는 가르침을 받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앙헬 베니토 아구아도 선생님이 제자를 구하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2012년 기타 공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더불어 프랑스 제작가 다니엘 프리드리히, 도미니크 필드 등 유명한 기타 제작가들과 파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받은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됐다.
악기를 제작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제작하는 ‘산토스 에르난데스 1924’, ‘콘서트 스프루스’, ‘콘서트 시더’는 각각 어떤 특징을 가지며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악기에 사용될 목재 선정부터 칠까지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약 3개월 정도 소요가 된다. 보통 12년 이상 자연 건조 된 나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악기를 만들 때 잘 건조된 나무를 구하는 것이 제작의 기본이자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악기를 만드는 과정은 세세한 작업들이 많아서 글로 설명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작업 프로세스는 비슷하지만 악기마다 나무가 다르고 사용자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매번 새로운 악기를 만드는 일이 된다.
마드리드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클래식 기타 거장 안드레 세고비아(Andrés Segovia)가 연주했던 ‘산토스 에르난데스(Santos Hernández) 1924’ 악기를 시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 후 그 따뜻하고 풍부한 저음의 매력에 빠져 카피를 하게 됐다. 마드리드에 위치한 음악박물관 “Victor Espinós”에 보존된 원본 모델의 구조와 소리를 그대로 재현하려 노력했다.
‘콘서트 스푸르스’ 모델은 안드레 세고비아(Andrés Segovia)의 일생 중 가장 빛나던 시기에 사용했던 전설적인 기타 헤르만 하우저 1세(Hermann Hauser I) 1937년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악기이다. 오리지널 악기의 음색을 해치치 않고 현 시대의 연주가들이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추가하여 새롭게 디자인 했다.
‘콘서트 시더’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모델로 스페인의 전통적인 부챗살 구조를 기반으로 나만의 디자인을 입혀 만든 악기이다. 고전적인 소리에 빠른 터치와 큰 음량이 특징이다.
악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체력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제작가로 활동하면서 느끼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처음 제작을 시작할 땐 연장을 잡아본 적도 없었고 육체적으로 강도 높은 일을 해 본적이 없었던지라 아주 힘들었습니다. 작업 하는 것이 손에 익을 때까지 몇 년이 걸렸고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나에게 맞는 작업 방식을 찾게 됐다. 그동안 근육도 생기고 저만의 스킬도 생기기 시작해서 지금은 많이 힘들지 않게 작업을 하고 있다.
손을 아주 많이 쓰는 직업이고 허리와 목도 항상 구부정한 자세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필라테스를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항상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으면 몸의 피로도 빨리 오고, 악기를 만들 때 더 힘이 들기 때문이다.
악기를 만들면서 느낀 점은 만드는 사람의 성격이 악기에 반영이 된다는 것이다. 가끔 화가 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혹시나 그런 기분이 악기에 반영이 될까 싶어 앞판 작업처럼 악기의 소리에 영향을 주는 예민한 작업은 하지 않는다.
스승인 앙헬 베니토가 제자를 모을 때, 기타 연주 능력과 음악에 대한 지식 등을 고려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 외에 루시어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성실함과 차분함 그리고 끈기이다. 모든 제작 과정은 수작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변수도 많이 생긴다. 그럼에도 고객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 악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루시어의 역할이다.
노력만으로 완벽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한대의 악기를 만들 때마다 악기 노트를 작성한다. 악기를 만들기 시작한 날짜부터 나무의 강도, 밀도 등을 전부 기록한다.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해도 나무의 밀도와 중량이 다르면 거기에 맞춰 변화를 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조절한 부분도 꼭 적어놓는다. 꼼꼼하게 기록하며 작업해 실수나 착오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악기에는 제작자만의 다양한 철학과 특징이 담기리라 생각된다. 박윤아 루시어의 악기가 가지는 차별성은 어떤 것일까?
한국 사람과 스페인 사람의 성격이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플라멩코와 판소리만 봐도 그렇다. 즐길 땐 즐길 줄 알지만 그 이면에 한(恨)의 정서도 가지고 있어 다양한 감정을 폭넓게 표현하는 우리나라와 스페인처럼, 내가 만든 악기는 한국과 스페인 감성이 물씬 담고 있어 연주자가 그리고자 하는 부분을 다채롭게 소화할 수 있는 점이 차별성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연주자로 활동했던 경험 또한 제작에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 악기를 만들면서 가장 먼저 시연을 해보고 좋지 않은 점을 빨리 알아차려 고쳐나가기 때문에 발전이 빠른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마드리드 왕실음악원에서 클래식 기타를 가르치는 남편인 하비에르 교수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료일 것 같다.
남편은 내가 처음 공방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줬다. 지금도 내가 만든 모든 악기를 시연해보고 장ㆍ단점을 얘기해 준다. 좋은 남편이기 전에 좋은 연주자로서 정말 큰 힘이 되어 준다.
‘한국인’ 그리고 ‘여성’이 클래식 기타 제작 시장에서 자리 잡기까지 많은 차별과 마주했으리라 생각된다.
처음에 나의 이름을 걸고 악기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반대가 많았다. 동양 여성의 이름으로 주는 데미지가 클 것이라며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굽히지 않고 내 이름을 사용했다. 정성들여 만든 악기를 공산품처럼 다른 이름을 붙여 판매하고 싶지 않았고 선입견과 싸워 이기고 싶었다.
수제 기타라는 악기의 특성상 직접 연주를 해 보고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스페인과 유럽에서 ‘한국인’ 그리고 ‘여성’이 주는 선입견은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이름과 국적이 문제가 된 것은 같은 동양권 나라에서였다. 악기가 맘에 들지만 그 나라에서 악기를 판매하고 싶으면 이름을 바꾸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고, 아직까지 그 결정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떤 루시어가 되고 싶은가?
기타리스트들이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드는 제작가가 되고 싶다. 기타는 음량은 작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악기이다. 이에 음색이 아름답고 연주하기 편한 악기를 만들고 싶다.
앞으로의 목표와 꿈은 무엇인가.
일단 내년의 목표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성실히 악기를 만드는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로맨틱 기타나 다른 카피 모델을 만들며 다른 시대 악기들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다. 나아가, 스승님께서 나를 제자로 키워 주신 것처럼 기타 제작에 흥미를 갖고 있는 후배를 양성을 하는 게 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