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프리뷰]바리톤 김기훈 “만족하는 예술가에게 미래는 없다”
[현장프리뷰]바리톤 김기훈 “만족하는 예술가에게 미래는 없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8.1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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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카디프 아리아 부문 한국인 첫 우승자
9.4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개최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브린 터펠과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가 경연하던 카디프 콩쿠르 영상을 보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던 전남 곡성의 소년은, 10년 후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6월 19일(영국 현지시간),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등용문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에서 바리톤 김기훈이 한국 성악가 최초로 ‘메인 프라이즈 우승’을 차지했다. 

1989년 메인 부문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가곡 부문 브라인 터펠이라는 세계적인 바리톤을 배출한 바 있으며, 한국인으로는 1999년 바리톤 노대산, 2015년 베이스 박종민이 가곡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김기훈은 두 부문 모두 결승무대에 올랐으며, 아리아 부문인 ‘메인 프라이즈’ 우승은 한국 성악가로는 최초다. 

김기훈은 콩쿠르 1차 무대에서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 중 ‘Mein Sehnen, mein Wähnen(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를 불렀는데, 이를 듣던 심사위원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중계 방송을 타면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어 결선에서는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중 ‘나는 이 동네 제일가는 이발사’, 바그너의 <탄호이저> 중 ‘오 나의 성스러운 저녁별이여’,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중 ‘조국의 적’을 차례로 노래했다.

17일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김기훈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통해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었다고 말하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참가했던 꿈의 대회 ‘카디프 콩쿠르’에서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라면서도 “내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월등하거나 대단해서 받은 상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취향에 좀 더 맞았다고 생각한다”라며 겸손한 소감을 전했다.

​▲바리톤 김기훈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코른골트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를 노래하고 있다.
▲바리톤 김기훈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중 ‘당신의 시선을 나에게 돌려주세요’를 노래하고 있다.​(제공=아트앤아티스트)

2019년에 세계 최고 권위의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와 ‘도밍고 콩쿠르’라 불리는 <오페랄리아 국제성악콩쿠르>에서 연이어 2위를 차지하며 세계 오페라 무대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김기훈은 이번 우승으로 또 한 번의 쾌거를 거뒀다. 그는 “우승을 욕심냈던 성악계 대표 콩쿠르에서 2번 연속 2위에 그쳐 사실 아쉬움이 있었다”라고 말하며 “프로게이머 홍진호 씨의 심경이 이해됐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수상 이후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로부터 마린스키 극장 전속 성악가 제안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그는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제르몽으로 출연했다.

이처럼 세계 무대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는 그이지만, 김기훈은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성악을 시작했다. 이전까지 그는 KBS ‘열린음악회’에 나오는 성악가의 소리를 곧잘 흉내내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전라남도 곡성에서 나고 자라며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는 게 전부였던 그는 세미나에 참석한 어느 강사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곡성은 ‘골짝나라’로 불릴 만큼 완전 시골이다”라며 “처음엔 부모님께서도 워낙 반대를 하셔서 ‘노래 좀 하네’라는 소릴 들을 정도면 시작도 안 하려 했는데, ‘세계적으로 성장할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됐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바리톤 김기훈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중 ‘당신의 시선을 나에게 돌려주세요’를 노래하고 있다.
▲바리톤 김기훈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코른골트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를 노래하고 있다.​(제공=아트앤아티스트)

타고난 재능으로 굴곡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그에게도 좌절의 순간은 있었다. 대학에 다니던 중 가게 된 군대에서 성대 결절을 얻었고, 그 일을 계기로 10개월 간 슬럼프에 빠져 음악을 그만두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당시 체육관에 다니며 복싱과 격투기를 배웠는데 관장님께서 재능이 있다고 선수를 진지하게 권하시기도 했다.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니 점점 원래 컨디션을 되찾았다”라고 전했다.

이어 “군대에 다녀온 후 군 면제가 되는 메이저 콩쿠르 3개에서 수상을 해서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라며 “하지만 군대에서 배운 게 많기에 후회는 없다. 가능하다면 내가 가진 군 면제권을 BTS 멤버들에게 주고 싶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슬럼프를 극복한 김기훈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수석 졸업(김관동 교수 사사) 및 독일 하노버 음대 석사를 만장일치 만점으로 졸업했으며, 현재 동대학 최고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다. 2016년부터 3년간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리골레토>, <살로메>, <나비부인>, <라 트라비아타>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꿈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김기훈은 순위 자체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만족하는 예술가에게 미래는 없다. 만족하는 순간 예술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타이틀을 하나 얻었다고 자만하거나 현상을 유지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큰 꿈을 그리되 앞에 있는 현실적인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고 싶다”라는 뜻을 전했다. ‘정말 잘 하는’ 바리톤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김기훈은 “소프라노 하면 조수미를 떠올리듯 바리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함께 내비쳤다.

▲바리톤 김기훈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린 간담회 자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제공=아트앤아티스트)
▲바리톤 김기훈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린 간담회 자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제공=아트앤아티스트)

올해와 내년엔 독일 뮌헨 바이에른 극장과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라 보엠>, 미국 샌디에이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코지 판 투테> 등의 무대가 예정돼 있고, 영국 코벤트가든, 미국 워싱턴 국립 오페라 등 해외 주요 극장에서 활발히 활동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내달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국내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첫 리사이틀을 갖는다. BBC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의 눈물을 자아냈던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와 로시니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나는 이 거리의 만능일꾼’ 등 무대를 차례로 선보인다. 이와 더불어 그와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소프라노 서선영, 테너 강요셉이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