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선을 넘은 평론, 상처 받는 무용가
[이근수의 무용평론]선을 넘은 평론, 상처 받는 무용가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8.30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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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평론가에겐 자신의 평론관이 있다. 자기 일에 대한 원칙과 지켜야할 기본자세에 대한 것이다.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나의 평론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평론은 권력이 아니고 위로다. 작품의 가치를 찾아내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이 무용가에게 참 위로가 된다고 믿는다. 정직한 평론가로 기억되고 싶다.

둘째로 무대에 오른 작품을 직접 보고 글을 써야 한다. 공연을 보지 못한 독자들이 대부분이다. 작품내용에 대한 소개와 설명이 우선이고 비판위주가 되서는 안 된다.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표현은 무책임한 것이다 가급적 피해야 한다.

셋째로 평론은 글쓰기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개인적인 이득이나 특정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론을 이용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른 평론들을 종종 읽는다. 몇 몇 춤비평가의 리뷰는 작품의 구석구석을 찾아내는 심미적 능력, 맛깔스러우면서도 튼튼한 문장, 춤에 대한 세밀한 묘사 등이 마치 옆에서 춤을 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글도 있다. 어느 온라인 매체 최근호에 실린 다음 평론 같은 경우다.

“의미와 잔치에 역점을 두었다는 축제의 취지를 따르기엔 역부족의 행사로 대구시립무용단의 행보(작품)에 따른 실망스러움을 완화시켜주지 못했다”

“사흘에 걸쳐 무대에 오른 여덟 편의 작품은 볼 만하지 않거나 그나마 볼만한 것도 춤 이미지의 나열과 그것조차 짧게 편집된 춤이었다. 40년 역사의 의미를 온전하게 녹여내지 못한 이름만 무색한 잔치였다.”

“가야금 선율은 더 없이 아름답고 색채가 영롱하건만 춤은 어찌 저토록 취기어린 상념같이 무대를 배회하는지...<월훈>은 안무자의 상념의 허술함과 그 흔들거림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었다.”

글의 앞부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우선 행사를 주최한 무용단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무대에 오른 8개 작품(MODAFE 40이 선정한 5개 작품과 대구시립무용단 제작의 3개 작품)에 대해 제목 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개별적 리뷰나 설명 없이 행사 전체를 일괄적으로 평가절하 해버린 느낌이다. 세 번째 문장은 8개 작품 중 김성용이 안무한 ‘월훈’에 대한 언급이다. 춤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역시 생략된 채 비판만 남은 어색한 글이다.

이러한 글들이 무용가에겐 얼마나 큰 상처로 남을까. 나는 김성용을 잘 모른다. 2013년 서울무용제에서 경연부문 대상을 탄 <초인(Nietzsche's Speech)>을 본 후 “<초인>은 작품의 신선도와 완성도로 볼 때 대상작품으로 손색이 없었고 여자연기상을 받은 박은영의 춤도 탁월했다.”란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 작품의 안무자가 김성용이었다. 수상자 인터뷰를 읽었다. “정의로운 예술가가 되겠다. 욕심을 부리기보다 하고 싶었던 것, 좋아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무용을 하겠다는 뜻이 ‘정의롭다’의 정의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말자.”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 때의 젊은 무용가가 대구시립무용단장으로 취임하고 3년의 임기를 마쳐가는 시점에서 현지의 평론가에 의해 이렇게 매도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평론의 중간 부분은 이렇게 이어진다.

“춤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춤의 기술적 형식적 측면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이다.”기본을 들여다보는“작업은 여러모로 낡은 춤에서 춤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기본 춤을 가지고 연습을 하는 것은 춤이 가진 예술성의 잠재와 움직임의 제약의 실험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춤 언어에 잠재된 가능성 일체를 흔들어 깨우고 활성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감행한 일련의 실험이었다면 특히 다양한 춤 언어의 창작을 통해 실험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춤은 차이에 의해 분할되고 반복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주와 실험을 향해 열려 있어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무한한 텍스트여야 한다.”

무척 어렵게 읽혀지는 대목이다. 인용 표시가 없는 것을 보면 평론가 본인의 주장이라고 생각되지만 이해되지도 수긍이 가지도 않는 내용이다. 더구나 특정 공연을 평론하면서 이런 이론이 동원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평론가는 춤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가질 수 있지만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이 보편적이어야 하고 충분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평론은 또한 독자와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와 문법에 의해서 쓰여 져야 함이 글쓰기의 기본일 것이다. 

글은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맺고 있다.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제 춤적 실천에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실천이 불가능한 요구다. 그런데 이를 실천해내는 무용가도 있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개인의 원망에서 비롯되지 않는, 세상의 한 불행한 테마를 실현하는 대응능력을, 그 지켜내기의 힘겨움을 춤으로 기꺼이 실현해내는 무용가를 안다. 그것이 인간의 위의이며 예술가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이들이 예술을, 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다.”

"춤 이미지의 시대는 이미 가고 있는 중이다. 움직임의 기능에 집착한 나머지 춤의 정신과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이들 단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존재)은 무엇(누구)일까? 궁금하다.   

궁금하기보다는 놀라운 결론이다. ‘실천이 불가능한 요구’를 기꺼이 실현해내는 그 초인적인 무용가는 누구인지, 그리고 ‘춤의 정신과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이들 단체를 움직이게 하는 존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이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주장이 평론의 결론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선호하는 예술가를 가질 수 있지만 평론 글에서 이를 내세우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

평론은 작품에 대한 평가와 기록이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론이 인격에 대한 비난이나 모독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평론가는 비난하기에 앞서 예술가에 대한 선의와 존중이 필요하고 실을 수 있는 글과 싣지 말아야할 글을 선별하는 것은 독자와 관객을 중시하는 춤 매체의 기본적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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