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김기훈, 앞으로 나아가라!”
[이채훈의 클래식비평]“김기훈, 앞으로 나아가라!”
  • 이채훈 클래식전문객원기자/클래식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0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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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카디프 콩쿨 우승한 바리톤 김기훈 귀국 독창회 , 감동의 무대로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어제(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리톤 김기훈 귀국 독창회가 열렸다. 지난 6월 19일 BBC카디프 콩쿨을 석권한 뒤 두달 반 만에 한국 팬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자리였다. 김덕기 지휘 코리아쿱 오케스트라가 함께 했고, 소프라노 서선영과 테너 강요셉이 찬조출연했다. 코로나19 때문에 두 석 사이에 한 석씩 비워두긴 했지만, 객석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김기훈은 시종일관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한국의 팬들 앞에서 고향집의 안락함을 느끼는 듯 했다. 이 편안함과 여유로움은 그가 갈고 닦은 탄탄한 기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충만했으며, 부드럽고 윤기 있었다. 정확한 음정과 깔끔한 스케일이 인상적이었다. 여리게 노래할 때 연기와 표현력이 섬세했고, 강하게 노래할 때 무리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호흡이 자연스러워서 청중들은 부담 없이 음악에 마음을 맡길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도 열심히 잘 연주했고, 곡목 선정과 배열도 성의가 있었다.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에 이어 피가로 아리아, 바그너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 이어서 탄호이저 아리아, 차이콥스키 <예프게니 오네긴> 폴로네즈에 이어서 오네긴 아리아를 들려주는 등 서로 연결되게 관현악곡과 성악곡을 배치하여 다채로운 메뉴를 제공한 것은 효과적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세에 밀려서 자주 공연되지 않지만 차이콥스키의 천재성을 담고 있는 <예프게니 오네긴>을 포함시킨 것도 의미가 컸다. 오네긴의 아리아와 마지막 이중창 - 타치야나와 오네긴 - 을 자막과 함께 들려주어 푸시킨 원작의 아름다움과 차이콥스키의 뼈아픈 자전적 고백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 주었다. 오네긴을 맡은 김기훈은 물론, 타치아나를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의 열창이 청중들을 압도했다. 소프라노 서선영과 테너 강요셉이 김기훈과 함께 무대에 오른 베르디 <가면무도회>도 강한 여운을 남겼다. 리카르도, 아멜리아, 레나토의 사랑과 우정과 배신을 이중창, 삼중창, 아리아 등 세 곡으로 압축해서 들려주었는데, 이 오페라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 준 선곡이었다. <가면무도회> 앞에 레온카발로 <팔리아치>의 ‘신사 숙녀 여러분’을 배치한 것도 재치 있었다.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 모습(사진=아트앤아티스트 제공)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 모습(사진=아트앤아티스트 제공)

BBC 카디프 콩쿨 때 심사위원이 눈물을 흘렸다는 코론골트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가 기대됐는데, 김기훈의 표현력은 역시 일품이었다. 회한에 잠겨 “나는 광대였다”고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는 하프, 호른, 목관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녹아 흘렀고,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 청중들이 많았을 것이다. 2부 마지막 곡은 폴란드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오페라 <로제르 왕> 증 ’에드리치, 새벽이다‘였다. 길지 않은 곡이지만 대편성의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김기훈 내면의 힘과 열정은 강렬했다. 이 두 곡은 한국 초연이라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태리어와 독일어는 물론 러시아어와 폴란드어까지 구사하는 김기훈의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 모습(사진=아트앤아티스트 제공)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 모습(사진=아트앤아티스트 제공)

적절한 성량 덕분에 오케스트라와 음향 밸런스가 잘 맞았다. 바그너 <탄호이저> 중 ‘저녁별의 노래’에서 트럼본과 튜바 소리에 한번 파묻혔는데, 좀 더 큰 성량으로 노래하거나 금관이 볼륨을 조금 낮춰 줬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며 음악을 이끌어 간 그의 역량은 세계 수준의 성악가로 손색이 없었다. 앵콜곡으로 그는 조르다노 <안드레아 셰니에> 중 ’조국의 적‘과 차이콥스키 오네긴의 아리아, 이렇게 두 곡으로 청중들의 환호에 보답했다.

스스로 ‘곡성 촌놈’이라 부르는 그는 고3때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세미나에 온 강사의 눈에 띄어 성악을 시작했고, 10여년 만에 세계 굴지의 카디프 콩쿨을 석권하여 흐보로스토프스키와 브라인 터펠 등 세계적 성악가들과 나란히 서게 됐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얼핏 보면 웨이터 출신으로 어느날 갑자기 세계 스타가 됐다는 어떤 성악가의 신데렐라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만년 2등’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뛰어넘으려고 오랜 세월 남몰래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임을 잊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 모습(사진=아트앤아티스트 제공)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 모습(사진=아트앤아티스트 제공)

김기훈은 이 날 한국의 팬들 앞에서 역량을 검증받았다. 그는 이미 준비하고 있는 <라보엠>의 마르첼로는 물론, ‘활력과 꾀가 넘치는’ 피가로부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안드레아 셰니에까지, ‘밀 에 트레’를 익살스레 읊는 레포렐로부터 사랑하는 딸을 비통하게 애도하는 리골레토까지, 모든 바리톤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는 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빌 것이며, 어쩌면 국내 오페라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지도 모른다. 리트의 세계에서도 그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보여주었던 겸허하고 소탈한 음악가의 태도를 유지하며 변함없이 정진한다면 그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그가 부른 시마노프스키의 아리아, 그 잔향이 아직도 귓가에 힘차게 울려 퍼진다.

“에드리히, 앞으로 나아가라! 김기훈, 앞으로 나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