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의 장터이야기 41]내 어렸을 적에는 ...
[정영신의 장터이야기 41]내 어렸을 적에는 ...
  • 정영신
  • 승인 2021.09.0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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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신의 장터이야기 (41)

 

1991 전북 순창장 Ⓒ정영신
1991 전북 순창장 Ⓒ정영신

 

내 어렸을 적에는 온통 초록에 갇혀 살았다.

문만 열면 초록 안에 갇혀있는 섬이 되어

길에 흙먼지를 날리는 여름이면

삐쭉삐죽 나락이 눈앞에서 커갔다.

가을이 되면 동네 뒷산은 먹거리로 풍성했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이불처럼 덮여

넓은 마당이 공책인 양 오만가지를 그리며 놀았다.

 

1989 충북 영동장 Ⓒ정영신
1989 충북 영동장 Ⓒ정영신

 

별이 쏟아지는 여름날 마당에는 대나무로 만든 평상에 앉아

옥수수와 감자를 먹으며 재잘거리는 웃음소리가 하늘 끝에 걸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앉아 푸실푸실한 고구마와

땅속 깊이 묻어둔 동치미 무를 양손에 들고,

쥐처럼 야금야금 파먹었다.

 

1991 전북순창장 Ⓒ정영신
1991 전북순창장 Ⓒ정영신

 

시골의 겨울밤은 봉창 흔드는 바람 소리와

대나무 숲에서 사각사각 불어오는 소리는 음악이었다.

장터에서 튀겨 온 뻥튀기를 벽장 속에 숨겨두고,

입 안 가득 넣고 끼득거리다 방바닥에 흩어지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런 아련한 추억이 나를 장터로 향하게 했는지 모른다.

 

1992 충북 영동장 Ⓒ정영신
1992 충북 영동장 Ⓒ정영신

 

시간이 지나면 내 슬픔이 놓여있던 자리가 바뀔 줄 알았는데,

날이 갈수록 엄마의 부재로 인해 내 슬픔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예전에 장터에서 만난 엄마들을 소환해본다.

터질 것 같은 홍시감을 먹으라며 수줍게 건네던 나주장의 박씨할매,

쩍 벌어진 석류 한쪽을 건네던 순창장의 강씨할매,

시퍼런 오이를 옷에 쓱쓱 문질러 주던 영동장의 김씨할매,

밤 몇 알을 손안에 꼭 쥐어 주던 청양장의 남씨아짐 등

35년 동안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너무 많은 정()을 받아왔다.

 

1993 전북 순창장 Ⓒ정영신
1993 전북 순창장 Ⓒ정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