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집콕문화소개, 좋은 영화 다시보기Ⅱ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집콕문화소개, 좋은 영화 다시보기Ⅱ
  •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 승인 2021.09.0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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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열정에 노크하는 영화 ‘위플래쉬’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열심히 사느라고 살았는데도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며 갸우뚱거려봤을 당신과, 최고와 최선 사이에서 갈등하는 당신과, 그래도 부르릉부르릉 심장에 뜨거운 엔진을 점화시키고 싶은 당신에게 영화 ‘위플래쉬’를 소개하려고 한다. 영화를 본 당신이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길 바라면서. 

‘위플래쉬’는 전 세계 흥행에 성공한 ‘라라랜드’의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데뷔영화이며 무명시절 만든 동명의 단편영화로 각종 상을 받으며 결국은 장편으로 거듭난 영화이기도 하다. 무지개 같은 정서를 화성적인 선율로 보여준 것이 ‘라라랜드’였다면 ‘위플래쉬’는 한여름 밤 만나는 소나기처럼 직진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라랜드’의 대중을 녹이는 감미로운 멜로디와 화성적인 코드대신 정통 재즈비트를 영화 전체에 휘두르고 말이다. 2015년 국내에 개봉하여 예술영화로썬 이례적인 164만 관객이라는 메가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며 2020년에 재개봉되기도 했다. 아직도 안 봤다면, 그 전에 한 번 봤다면 다시 보자는 게 필자의 제안이다. 위드코로나 시대, 예술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말이다.

영화는 묻는다. 당신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열정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위플래쉬’는 음악영화이면서 음악영화의 범주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있다. 무릇 뛰어난 영화들이 그렇듯, 한계에 부딪치고 한계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이 그렇듯.
 
 “박자가 안 맞잖아! 다시, 다시, 다시” 

영화는 드러머를 꿈꾸는 주인공 앤드류(마일즈텔러)가 뉴욕의 최고 연주자들이 모인 명문 셰이퍼음악학교의 스튜디오 밴드에 입단하고 음악을 위해서는 어떤 폭언과 학대도 서슴치 않는 괴물 교수 플레쳐(J. K시몬스)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스토리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영화 ‘Whiplash’의 뜻은 ‘채찍질’이다. 여기서는 교수 플레쳐가 휘두르는 채찍질이 될 것이다. 완벽한 연주를 위해 동료를 짓밟게 하고, 단원들에게 욕을 하고, 부모를 비하하는 등 연주자의 자존감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채찍질. 이렇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재즈 선율을 연주하라니. 음악이 뭐고 예술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 이율배반적 상황 속에 놓인 관객은 상관없다는 듯 영화는 오로지 완벽한 무대만을 위해 달려간다.

혹독한 연습, 연습과 함께 뚝뚝 떨어지는 피가 무대를 적신다. 그 과정을 목도하는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왜 플레쳐는 저토록 야만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는가. 저 채찍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시대에 말이다. 연주를 중단시키고 “넌 끝이야” 통보하는 교수와 분노로 달려들며 주먹질하는 앤드류를 지켜보며 필자는 어느 쪽에 서 있는지 고민해 본다.

교육학을 공부한 입장과 예술가의 입장이 심장과 머릿속을 분주하게 오가며 엉킨다. 장르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성취도와 완성도를 다르게 갖겠지만 예술을 한다는 것에 열정은 실은, 부수적인 것이다. 수많은 좌절이 있지 않은가. 열정 이전에 더 중요한 게 있다. 재즈의 자유로운 선율과 비트 이전에 충실한 기본기. 영화가 교육자의 태도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영화의 시선을 충실이 좇아가면 플레쳐의 이 같은 요구 앞에 움찔하며 서게 된다. 기본. 그리고 자유로운 선율. 그것을 위한 열정. 그냥 열정도 아닌 한계를 뛰어넘는 초열정.

“한계를 넘는 걸 보고 싶었어”

결국 정도에서 벗어난 교수법으로 학교에서 해고당한 플레쳐. 앤드류는 우연히 들어간 재즈바에서 건반을 연주하고 있는 플레쳐교수를 보게 된다. 필자는 이 구간을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원 투 쓰리 딱 떨어지는 비트만을 외치며 혹독하기 그지없던 지휘자 플레쳐의 손끝에서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달빛에 춤추는 무용수와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할만큼 자연스럽고 완벽했다. 천만번의 연습을 통해 이뤄낸 정확함을 넘어선 자유로움의 경지. 또한 스스로 흐름을 즐기는 연주자. 지금껏 플레쳐를 경계한 앤드류는 녹아내린다. 관객의 절반쯤도 녹아내릴 것이다.

경직된 연주자들, 강렬하게 압도하는 드럼비트, 그리고 자유로운 재즈.

우여곡절 끝에 플레쳐의 연주단에 다시 들어가게 된 앤드류. 연주 당일 플레쳐는 단원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악보를 앤드류에게 건넨다. 많은 이들이 학교에서 쫒겨난 것에 대한 플레쳐의 복수라고 이해하는데 필자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반항, 기본에 충실, 그리고 열정적으로 한계에 도전한 제자를 위한 괴물 같은 교수의 괴물 같은 지휘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이건 신뢰에 대한 것이리라. 연주가 시작되자 앤드류는 반항하듯 치고 나간다. 드럼이 지닌 대체 불가한 리듬에 전 악기 파트가 놀랍게도 따라붙고 강렬한 비트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신뢰감 있는 재즈선율이 연주된다. “신호줄게요” 라고 짧게 외치는 앤드류. 이미 지휘자 플레쳐는 드럼의 템포를 존중하고 있다.

그동안 가족과의 관계에서, 연인과의 관계에서, 음악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앤드류의 자존감이 수직 상승하는 순간이며 드럼의, 연주의 한계를 극복하고 즐기는 순간이다. 광기어린 10여 분간의 연주를 필자는 당신과 공유하고 싶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고 살 수도 있겠지만, 열심히 사는데도 마주하는 결핍을 어쩔 수 없겠지만, 예술과 교육의 태도도 잊고 이 순간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 몇 번이고 숨죽여 들었던 플레쳐의 피아노연주도 몇 번이든 당신과 나누고 싶다.

‘다채로운 화성을 넘나드는 즉흥연주의 완벽한 재즈선율’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 ‘완벽함’을 위한 ‘피나는 노력’과 예술가적 열정을 ‘위플래쉬’를 통해 보게 되겠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영화의 주인공 앤드류처럼 임계점을 넘지 못했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틀린 리듬을 연주하는 것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것’에 대한 플레쳐의 분노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도 가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며 삶의 회의가 느껴질 때, 내가 연주할 구간의 정확한 비트와 음색을 탐색하고, 인식하고 초집중해 보는 시도는 그 자체로 소중할 것이다. 임계점을 뛰어넘느냐 마느냐는 그다음 문제다. 아니 문제도 아니다. 시도 자체가 위드코로나 시대에 우리를 덜 우울하게, 조금 더 발랄하게 만들 것임으로.

여담으로 필자는 플레쳐보다는 친절한 지휘자가 좋다. 
삶은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시켜야하는 연주만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