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70년대 학생회 중심의 마당극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70년대 학생회 중심의 마당극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1.09.0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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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의 연극성:반항과 풍자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내가 박사논문 제출과정만을 남긴채 박사수료를 마무리 할 즈음, 의외의 희소식이 독일정부장학재단 DAAD에서 왔다. 독일유학시험을 보고 독일유학을 떠나려 할무렵 독일 정부의 장학금을 줄 DAAD본부가 예산이 부족하니, 미안하지만 다음해에 와달라는 통지였다. 그 기다리는 1년 반 동안 감사하게도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교사를 하며 출국준비를 했다.

드디어 1961년 뒤늦게 유학길에 오르려는데, ‘미안하지만 독일로 오는 비행기 편도를 자비부담해서 오면 DAAD재단의 재정형편이 좋아지면 비행기값을 돌려주겠다’는 통지가 왔다. 적지않은 비용이지만 자비부담으로 독일로 어렵사리 떠났다. 이후 DAAD재단은 생각지도 않게 당시의 비행여비를 돌려줄테니 한국을 다녀와서 박사과정을 마치도록하라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동생들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었다.

물론 사랑하는 남편은 독일에 남겨둔채 나는 뮨헨공항을 떠나 한달음에 귀국하고 싶었지만, 넉넉한 왕복여비 덕분에 여러곳을 돌아보고 가기로 했다. 프랑스, 이태리, 그리스, 독일서 사귄 지인이 있는 태국의 수도, 어학코스에서 친하게된 대만의 신부님 방문등 세계를 좀 들여다볼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멋진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사실은 ‘2월 말 전에 돌아오면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의 교수로 채용될 절호의 기회이니 꼭 시간을 맞춰 돌아오라’는 선배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위해서 더 긴 여정을 만들었던가싶기도 했다. 참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렇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첫 경험을 한다. 돌아와보니 뜻밖에도 임신을 알게되고 다음 해에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연극전담교수로 자리잡게 된다. 독일어 원어연극을 가르치며 동시에 공연까지 올리는 연극전담교수를 하게된다. 하지만 당시 한국연극은 참으로 시작인듯한 모습이었다. 서양연극을 올린다고 해서인지 머리도 서양인처럼 빨갛게, 노랗게 물들인 모습으로 2개월 넘게 연습한 작품을 무대와 관객이 만만치않다보니 길어야 3일을 올리고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물론 폐허가 되다시피한 독일의 연극계도 60년대 초중반에는 힘들기 짝이 없게 보였다. 당시로는 가장 활발하고 유명한 M. 프리쉬(1911 ~1991)나 F.뒤렌마트 (1921~1990) 도 방송극의 귀재 G. 아이히(1907~1972)처럼 방송극으로 드라마 작품을 쓰고 성공의 귀추가 긍정적이면 비로소 무대에 올리곤 했다. 한국의 형편은 더 어려웠다. 1953년 3년의 가까운 6.25 전쟁을 치룬지 15,6년이 지났지만 독일처럼 길고 다져진 연극역사를 갖지못한 한국의 공연문화의 배경은 독일에 견줄바가 못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8,90년대 한국의 대학극은 마치 새로운 부흥기를 맞은듯 각 대학은 연극을 올리기에 바빴다. 특히 이화여대는 김갑순 영문과 희곡담당교수가 그 중심에 계셨고, 뒤늦게 독일연극 올리기에 힘을 보탠 나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교정의 한 가운데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마당극을 올리는 모습에 감탄과 경악을 동시에 느꼈다. 마당은 전교생을 모아놓고 탈춤의 형식을 빌어 '독재 박정희 정부'를 향한 젊은이들의 피끓는 반항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하지만 반항정신만 투철할 뿐 연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조악하다. 보고있자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연극과 연극정신을 오로지 정치적 반항의 도구로만 이용하고 있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나는 전통속의 탈춤을 보기 위해 현장공연을 찾아 공부를 하고자 애써보지만 아직 한국의 경제적 현실은 그러한 전통공연을 올리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국문과 출신 무세중이 배워 스스로 올리는 현장과 명동의 옛 국립극장(현 명동극장) 무대에 올린 봉산탈춤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이 어디서 전통과 현장을 오가며 한국인의 반항의 표현인 풍자와 해학과 유모어를 배울 수 있었을까. 당시 사회의 주인행세를 한 양반의 부도덕과 횡포를 꼬집으며 인간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과장과 유모어, 해학과 골개로 표출하면서 한을 풀어 오히려 화해로 이끌어낸 선조들의 ‘어쩔 수 없는 화해의 정신’ 은 미처 볼 수도, 헤아릴수도 없이, 절박한 젊은 정신으로 학생회 중심의 마당극은 정치극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연극의 미학과 연극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학생들의 마당극 현황을 보며 영문과, 독문과, 불문과, 중문과등의 연극담당교수 중심으로 연극을 가르칠 수 있는 세계연극 강좌를 열기로 제안, 그것이 토대가 되어 이화여대에서는 비로소 학과의 경계를 뛰어넘는 연계과정의 수업이 열리게 됐다. 그 연극교육 과정은 인기폭발하여 300명으로 시작한 강좌는 2,3년이 지나면서 1,500여 명이 넘는 규모로 커지며 그 강좌는 현장의 극작가, 연출, 배우, 무대설치가 등 현장의 인력을 초청해 교육시키므로해서 인기가 나날이 더 높아져 갔다. 그 결과 1)학교 외 연극계 현장의 젊은 지식인 관객을 늘여 주며, 2) 각 대학은 이러한 이화여대의 변화를 보며 각기 같은 형태의 연계강좌를 열며 연극계 현장에 새바람을 불어넣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연극발전의 제2의 태동기라해도 무리가 없는 1960년대 말, 1970년,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 연극계의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기로 보아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연극비평의 태동기라 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사료된다. 참으로 열정의 시기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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