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의 방법’으로 창작된 ‘Bodyscape’ 연작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실험적인 창작법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이건용이 물질적 육체를 근간으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 갤러리 현대에서 오는 10월 31일까지 열리는 《Bodyscape》전시다. 8일 전시 개막에 앞서 이건용 작가의 작품을 언론에 공개하는 자리가 열렸다.
“그린다는 것은 신체를 쓰는 것이고, 회화에서 하나의 선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8일 열린 간담회에서 밝힌 이건용 작가의 회화에 대한 핵심 정신이다. 이 작가는 자신은 항상 미술 바깥에서 미술을 바라본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술을 할 거라면 ‘홍익대’에 가서 하라는 어머니 뜻에 따라 이건용은 홍익대 미술 입시 시험을 준비했다. 그 당시 홍익대 학장은 김환기였다. 이건용은 당시 홍익대 입시 시험을 치르러 간 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했다.
이 작가는 시험일에 조금 늦게 시험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시험 과제로 나온 아폴로 동상의 앞자리는 이미 다른 수험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건용은 어쩔 수 없는 아폴로 동상 뒷모습을 그리는 자리로 가게 됐다. 한참을 그리고 있는데, 김환기 학장이 와서 이건용에게 ‘너는 왜 아폴로의 뒤통수를 그리고 있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에 이건용은 ‘미술하면 홍대라고 하는데, 특별한 것을 그려야 할 것 같아서 뒤통수를 그립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이건용은 이 일화를 통해 미술계 주요 흐름과 항상 조금씩 빗겨 서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했다. 전통적 의미의 ‘회화’는 작가 내면에서 쌓이고 완성된 작업이 바깥으로 발화돼 형상을 갖는 구조를 갖는다. 이건용은 이 구조를 뒤집은 작가다.
1960년대 말 본격적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한 이건용은 AG(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중요 작가였으며, 1969년 ST(Space and Time 조형학회)를 결성하는 등 당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흐름을 이끌었다. 1976년 이건용은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회 ST전》에서 총 아홉 가지의 방법론 중 일곱 가지의 ‘그리기의 방법(The Method Drawing)’을 발표했다.
먼저 발표된 일곱 가지 ‘그리기의 방법’은 화면의 뒤에서(76-1), 화면을 등지고(76-2), 화면을 옆에 놓고(76-3) 선을 긋는 것. 손목과 팔꿈치를 부목으로 고정하고 이를 하나둘 풀면서(76-4), 다리 사이에 화면을 놓거나(76-5), 화면을 코앞에 둔 채 양팔을 활짝 벌리고(76-6), 어깨를 축으로 삼고 반원의 선을 침착하게 화면에 남기는 것(76-7)이었다. 이후 온몸을 축으로 거대한 반원을 만들거나(76-8), 두 팔과 다리를 위아래로 점프하듯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날개 형상의 선을 드러내는 방법(76-9)까지 발표했다. 그리기의 방법’으로 창작된 이건용의 <Bodyscape> 연작은 76년도 이후 꾸준하게 창작돼왔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는 캔버스 사이즈가 커지고 컬러가 다채로워지는 변화를 겪었다.
이 작가는 “미술을 하되 그 내부의 논리를 따라가지 않는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건용의 방법론은 화면을 눈으로 마주하고 머리의 생각을 손으로 옮겨 그리는 전통적인 회화방법론을 폐기하고, 미술가로서 ‘그리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담는다.
<Bodyscape>연작은 작가 신체의 한계, 가용 범위가 ‘그리기’의 전제 조건이다. 그림이 담긴 캔버스의 크기는 모두 이건용의 키, 양팔과 다리 길이와 연관성을 갖는다. 그가 팔을 쭉 뻗은 높이만큼의 캔버스를 사용하고, 그의 다리 사이 넓이에 들어가는 캔버스가 선택된다. 신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고, 손이 닿는 만큼,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이동하며 수행하듯 천천히 선을 화면에 담는 과정을 이건용은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 나아가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이 작가는 “화가는 모름지기 자기 앞에 현전해 있는 평면에 무언가를 그리지만, 나는 화면을 제 앞에다 놓고 제 신체가 허용하는 것만큼만, 화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선을 그린다”라며 “그것은 평면을 보고 그 위에 무언가를 의식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팔이 움직여서 그어진 선을 통해서, 내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76년도 발표된 이건용의 ‘그리기의 방법’ 중 주목할 만한 방법은 손목과 팔꿈치를 부목으로 고정하고 이를 하나둘 풀면서(76-4) 선을 긋는 방법이다. 이 방법론은 팔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상태의 그리기 방법이다. 팔의 손목, 팔목, 어깨가 제어 축이돼 선은 3가지 형태를 갖는다.
이 방법론은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 통제 시스템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제어 축 안에서 창작되기 시작해, 제어를 벗어나는 선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독재 권력 아래서도 작가가 닿아가고자 한 표현의 방법, 지각과 존재의 확인을 담고 있다.
이건용 작가는 갤러리 작품 소개 이후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 이뤄진 다과자리에서 ‘76-1’방법을 시현하기도 했다. 다과가 담겨있던 종이 상자에 이 작가가 소지하고 있던 몽블랑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후 그는 작품과 함께 장난기 어린 포즈를 선보였는데, 진중하면서도 삶에 대한 작가의 유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