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프리뷰]‘데뷔 50년’ 피아니스트 서혜경 “The piano it’s me”
[현장프리뷰]‘데뷔 50년’ 피아니스트 서혜경 “The piano it’s me”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9.17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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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니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자
여성 피아니스트 최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 앨범 발매
“56년 친 피아노, 앞으로 56년 더 함께하고파”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얼마 전, 저 멀리 이탈리아에서 K-클래식의 위상을 높이는 낭보가 들려왔다.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김도현이 제63회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 피아니스트가 1위를 차지한 것은 2015년 이후 6년 만이다. 

부조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1위 없는 2위)을 차지한 이는 다름 아닌 피아니스트 서혜경이었다. 당시 서혜경의 수상은 동양인이 철저히 무시당하던 클래식 음악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1980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일이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예술의전당에서 데뷔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사진=리음아트앤컴퍼니)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예술의전당에서 데뷔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사진=리음아트앤컴퍼니)

1세대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데뷔 50주년을 맞아 1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후배들의 활약에 대해 “너무 자랑스럽다. (내가 수상했던) 그 시절에는 동양인이 굉장히 무시당하던 때였는데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다”라며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순위권에 든다면 사실상 모두 우승자나 다름없다. 국제 콩쿠르가 디딤돌이 돼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란다.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김도현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큰 역할을 기대하겠다”라고 밝혔다.

러시아 음악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서혜경은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축전 기간 중 처음 내한한 모스크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친 바 있다. 이 공연은 냉전 이후 굳게 닫혔던 러시아와 한국이 최초로 펼친 문화예술 교류였다. 이날 서혜경은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이듬해 모스크바필하모닉은 다시 내한해 서혜경을 초청,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이 공연을 기점으로 서혜경은 1990년 한ㆍ러 수교 이전에도 러시아 예술인들과 꾸준히 교류했다. 또한 그는 여성 피아니스트로서는 최초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전곡 앨범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전곡 앨범을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2010년 발매했다. 

▲2008년 1월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KBS 교향악단과 재기 무대를 가진 피아니스트 서혜경.(사진=크레디아 제공)
▲2008년 1월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KBS 교향악단과 재기 무대를 가진 피아니스트 서혜경.(사진=크레디아 제공)

러시아와의 깊은 인연을 바탕으로 오는 26일 서혜경은 ‘라흐마니노프’ 스페셜 콘서트를 갖는다. 이번 무대에선 특히 러시아와 인연이 깊은 20대 후배 피아니스트 두 명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거장 엘리소 비르살라제의 제자 윤아인과,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를 차지한 러시아 신예 다니엘 하리토노프와 함께한다.

많은 러시아 작곡가 중 왜 ‘라흐마니노프’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서혜경은 유방암 투병 시기를 회상했다. 전 세계를 누비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에게 급제동이 걸린 것은 2006년 10월이었다.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은 그는 절제 수술과 8번의 항암치료,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견디며 죽음에 저항했다. 

그는 “오른쪽에 암 두 덩어리가 있었다. 오른쪽을 아예 못 쓸 거라 생각했기에, 피아노를 왼손으로만 연습하기도 했다. 당연히 쉽지 않았고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좌절감에 우울증을 겪었다”라고 말하며 당시를 떠올렸다. 

수술로 피아노를 잃을 뻔했던 그는 항암치료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던 2008년 1월, 서울 예술의전당 컴백 무대에 올랐다. 엄청난 기교와 힘이 필요해 ‘악마의 작품’으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동시에 연주했다. 

유독 러시아 작곡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러시아의 정서에는 민요가 섞여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에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의 노스텔지어(nostalgia), 향수가 녹아 있고 이에 따른 아픔이 묻어난다. 우리 민족의 한(恨)과도 닮았다. 이는 내가 느끼던 감정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예술의전당에서
데뷔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사진=리음아트앤컴퍼니)

서혜경은 다섯 살에 피아노를 처음 시작해 1971년 7월 3일 11살에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의 협연 무대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연주하며 데뷔했다. 예원학교 2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해 다나카 기요코를 사사하고 1975년에는 뉴욕 매네스 음악학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에게 배웠다. 1977년에는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들어가 사샤 고로드니츠키의 제자가 됐다. 

그는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로맨틱 스타일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잇는다. 로맨틱 스타일은 건반 악기인 피아노를 레가토 악기라 생각하고 음들을 부드럽게 이어가며 연주하는 방식이다. 서혜경은 “여든여섯 살까지 세계 무대를 누빈 러시아의 슈라 체르카스키(Shura Cherkassky)처럼 요제프 호프만의 로맨틱 연주 스타일 전통을 계승하며 나만의 연주를 오랫동안 선보이고 싶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이슈가 됐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의 부조니 콩쿠르 최초 최고 순위 입상 논란에 대해서는 “한국인 최초로 최고 순위에 오른 수상자는 나라고 알고 있다. 동양인에게 1등을 주기 않기 위한 움직임이 많았던 시절이다. 당시 1등 없는 2등으로 최고 우승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모 언론사에서 내가 아닌 백건우 선배가 최초로 우승자라고 보도해 놀랐지만, 사실이 아니니 금방 정정 될 거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백건우는 1969년 본상이 아닌 격려상에 해당하는 특별상 메달을 받은 바 있다.

한편 서혜경은 오는 26일 열리는 ‘라흐마니노프 스페셜 콘서트’에 이어 내달 16일 러시아에서 개최하는 한러수교 3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국 대표로 출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협연한다. 또 11월에는 시애틀에서, 2022년에는 뉴욕, 2023년 마이애미에서 각각 연주회를 펼칠 예정이며, 2022년 4월 11일부터 17일까지 뉴욕필 상임지휘자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의 지휘로 홍콩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를 연주한다. 

이달 23일엔 멘델스존의 ‘Rondo Capriccioso Op.14’, 파데레프스키의 ‘Minuet in G, Op.14 No.1’, 라흐마니노프의 ‘Rhapsody on a Theme by Paganini Op.43 Var.18’등 6곡이 담긴 소품집 My Favorite Works를 디지털 앨범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음악은 산소와도 같다. 피아노는 곧 나 자신이다. 피아노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건강만 허락해 준다면 56년은 더 해보고 싶다”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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