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왕조의 탄생과 ‘天’
[성기숙의 문화읽기] 왕조의 탄생과 ‘天’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10.1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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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기까지 태조 이성계 주변엔 두 사람의 결정적인 조력자가 있었다. 바로 무학대사와 정도전이다. 무장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자문과 조언에 따라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를 접수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 왕조가 원에서 명으로 바뀌는 절묘한 시점을 통찰하여 군대의 회군을 유도한 이는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의 자문에 따라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그를 왕사(王師)로 섬겼을 정도로 깊이 신뢰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를 추진한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궁궐을 동향으로 건립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에 반해 개국공신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향으로 지을 것을 권한다. 태조는 정도전의 뜻에 따라 북악산을 배경으로 조선 최초의 정궁 경복궁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주지하듯이,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통한다.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신봉한 그는 조선 초기 성리학적 예악문화의 제도화를 구현한다. “악은 천지의 조화이고, 예는 천지의 질서”(樂者 天地之和也, 禮者 天地之序也)라는 유가의 예악사상은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중시되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정재(呈才, 궁중무용)의 악장을 지어 올렸다. 대부분 조선창건의 정치적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이 그 좋은 예이다. 정도전은 태조 2년(1393)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정재 몽금척과 수보록의 악장을 헌상했다. 몽금척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잠저(潛邸)에 머물 때의 꿈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성계에게 금척을 건네주고 왕이 될 덕망과 문무를 갖추고 있음을 칭송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수보록 또한 비슷한 맥락에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지리산 석벽에서 이서(異書)를 얻었는데, 역시 왕이 될 인물임을 예고한다는 내용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이른바 천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수보록과 관련하여 『태종실록』의 기록도 주목된다. 여기서 ‘이(李)’자는 ‘나무 목’(木)자에 ‘아들 자’(子)의 조합으로, 이성계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된다. 모두 이성계가 조선 창건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이후의 기록들이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새삼 반추되는 대목이다.

풍수지리설에 경도되어 명당을 찾아 조상의 묘를 조성한 사례도 있다. 내포 가야산의 천년 고찰 가야사를 불태우고 선친 이구(李球), 즉 남연군묘를 쓴 흥선군 이하응의 권력을 향한 전략적 행보가 흥미롭다. 조선 말기 이하응은 왕족이었음에도 안동김씨 권세에 눌려 평범을 가장한 행색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유랑한다. 충청도 내포 덕산 땅에 머물 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가야산 동쪽에 조상의 묘를 쓰면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也)라고 귀뜸해 준다.

이에 흥선군은 가야산 자락에 선친 남연군묘를 조성한다. 이곳은 원래 가야사가 있던 자리였다. 후손 중에 왕이 탄생한다는 말에 흥선군은 승려들을 내쫓고 불을 질러 사찰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묘를 쓴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선군이 가야사 주지에게 2만냥을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고 전한다. 폐사지가 된 가야사 터에 남연군묘가 조성되었고, 후일 그의 아들 고종이 조선의 26대 왕위에 올랐으니 지관의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흥선군은 1865년(고종 2년) 가야산 건너편 서원산 기슭에 사찰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 이름하였다.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데, 가야사를 불태운 것에 대한 유감의 뜻도 담겨있다고 여겨진다. 보덕사에 대한 흥선군의 관심과 지원은 남달랐다. 직접 편액을 써서 보덕사에 하사했고, 극락전에는 흥선군이 발원한 불화가 봉안되어 전한다. 보덕사는 왕실의 원당(願堂) 사찰로 존재했는데, 특히 흥선군은 큰 아들 이재면을 시주자로하여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과 그의 손녀딸 한영숙은 내포 홍성 출신이다. 한성준은 내포의 유서 깊은 사찰 수덕사에서 춤과 장단의 원리를 터득하고 근대 전통춤을 집대성 및 무대양식화하는 등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맥은 손녀딸 한영숙으로 이어졌다. 한영숙은 조부의 뜻에 따라 보덕사에 들어가 100일 동안 승무를 연마하여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일찍이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반열에 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한성준은 한말 고종의 부름으로 궁중어전에 나아가 기예를 선보였고, 참봉(參奉)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다. 비록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신분적 특권을 누리며 예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한편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1940년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한성준의 전통가무악을 관람하고 깊은 감동에 젖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전통예인 한성준은 조선왕조와 인연이 깊다. 그가 창안한 태평무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상정하고 만든 춤이다. 나라의 태평성대와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한성준은 태안 안면도 당굿에 참여하여 무당이 추는 ‘왕의 춤’을 보고 이에 착안하여 태평무를 만들었다. 굿의 주재자 무당은 하늘[天]과 땅[地]을 매개하는 신령스런 존재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 무당은 신을 관장하고 현실 정치를 담당한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도래했다. 최근 무속논란이 뜨겁다. 한 대선후보가 손바닥에 ‘王’자를 표시한 것이 논란의 씨앗이 됐다. 핵심 키워드는 역시 천(天)이다.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시기부터 하상주(夏商周)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 중국인들은 천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했다. 천은 우주와 지상을 매개하고 만물을 관장하는 존재이자 신령스런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 여겼다.

봉건전통시대 황제(왕)는 ‘천자(天子)’라 불리었다. 황제(왕)는 천명(天命)에 의해 탄생된다고 믿었다. 천명을 받은 인물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전통시대 사유체계에서는 자연스런 귀결이다. 근대 국민국가 성립 이후 합리적 이성의 작동으로 인식체계의 대전환이 이뤄졌다. 그런데 21세기 최첨단 문명국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일상에서는 무속과 점술 등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주술적 관행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내년 ‘천명의 주인공’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