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눈물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눈물
  • 주재근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 승인 2021.10.1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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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Korea와 Corea는 둘 다 틀리지 않지만 Korea로 써 주기 바란다.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가다. 조선인은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조선어는 중국어나 일본어와 다르다. 조선은 미국과 1882년에 조약을 맺었다. 여기 전시된 모든 물건들은 정부의 물건들이다. 조선인들은 기와로 만든 지붕과 따뜻하게 데워지는 마루가 있는 편안한 집에서 생활한다. 조선의 문명은 오래되었다.”

1893년 5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개최된 시카고만국박람회(World’s Coloumbian Exposition)에 조선전시관 앞에 쓰여진 안내말이다. 우리나라가 대조선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가지고 처음으로 참여한 시카고만국박람회는 콜롬버스가 미국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었으며 세계 46개국이 참여하고 총 2,700만명이 관람한 당시 최대규모의 박람회였다.

고종은 러시아, 일본, 청나라 등 강국의 무력 앞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신문물을 익히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였다, 1880년대부터 개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제 정세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 청나라에 신사유람단이나 영선사를 보내는 등 근대 문명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였다. 또한 세계박람회를 국제 사회에 조선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산업과 기술 진흥에도 주요한 역할을 하는 무대로 인식하였다.

고종의 바램은 그와 절친한 친구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1841~1898)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알렌은 청나라와 일본의 국제적 방해를 모두 물리치게 하고 미국 현지에서 조선 물품 및 행사를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처음으로 참가하는 국제박람회이니 만큼 조선을 대표할 만한 도자기, 그림 등 수준 높은 공예품부터 조선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물품들을 보냈다. 1893년 5월 3일 시카고에 도착한 전시품이 23톤에 달하는 83개의 화물에 실려왔다고 할 정도로 어마한 양을 보낸 것이다.

그 물품 가운데는 악기도 보내어졌는데 장구, 용고, 양금, 거문고, 당비파, 피리 2개, 생황, 대금, 해금 등 9종 10점의 악기도 보냈다. 이 악기들은 현재 미국 셀럼시 피바디에섹스박물관에 수장되어 있으며 2013년 10월1일부터 12월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된 바 있다.

2012년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와 2013년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악기를 국내 전시 진행과정을 담당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은 고종의 문화적 혜안이었다.

고종은 서양인들이 조선, 일본, 중국 사람들을 보면 잘 구분을 하지 못할 것인데 바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을 들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정경원을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으로 명하고 통역 안기선과 최문현 이외 궁중 악공 10명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 왕실의 재정 형편상 10명이나 되는 악공을 파견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표단과 악공들은 1893년 3월22일 한양 도성을 출발해 3월 23일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3월 27일 고베에 도착한 후 기차를 타고 도쿄에 3월29일 도착하였다. 이어서 4월 8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탄 뒤 4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다시 4월 25일 기차로 시카고에 4월28일 도착하였다.

지금이면 시카고까지 한나절이면 가는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43일이나 걸린 것이다.

당시 미국 공사로 있었던 이채연은 전통 악단과 동행하였는데 미국의 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안내 부탁을 하였다.

“저희가 전통 악단을 시카고에 데리고 온 것은 단지 전시용으로 삼고자 함이 아니라 공적인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조선 정부가 박람회에 사용할 충분한 경비에 관한 내용이나 박람회 내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여러분이 악단에게 돈을 줄 테니 연주를 해 달라는 식으로 요청함으로써 이들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알려지지도 않은 동양의 가난한 나라 조선의 사신이 자국의 악사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을 본 미국인들은 적지 아니 놀랐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우리나라 대사관과 영사관이 있다. 이채연과 같은 음악과 예술을 존중할 줄 아는 외교관이 많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1893년 5월1일 시카고만국박람회 개막식에서 조선의 음악을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 앞에서 연주하였고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들 악공 10명은 5월 3일 귀국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머무를 경비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들은 다시 43일 이상 걸려 귀국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즈음 한류드라마에 이은 K-POP, K-FOOD, K-MUSIC 등 전 세계에서 우리의 문화예술에 열광 소식을 듣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영면을 한 고종이 이와같은 소식을 듣는다면, 살아서는 아쉬움과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면 이제는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고종, 그의 꿈을 이루는 데 100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