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무용단의 '다섯(FIVE) 오'-오방처용무의 시대적 소명
[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무용단의 '다섯(FIVE) 오'-오방처용무의 시대적 소명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0.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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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캄캄함 어둠 속, 무대를 가로지르며 흰 조명을 받은 스무 개 손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손바닥에 비누칠을 하고 손가락 구석구석을 깨끗이 씻어내고 어스름히 드러나는 몸을 씻고 주변을 소독하고…이제는 익숙한 일상이 된 코로나환경이 작품의 주제를 암시한다. 귀를 찢는 비명소리는 지구환경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커다란 흰색 탈을 쓴 다섯 명의 처용이 양 손에 흰 수건을 펄럭이면서 등장한다. 흰색과 검정색의 대비가 선명하다. 2019년 11월 국립무용단장에 취임한 손인영이 2년의 침묵을 깨고 첫 안무작으로 공개한 ‘다섯 FIVE 오’(2021,9,2~5,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첫날 공연을 보았다.

다섯 처용이 보여준 에너지를 2막의 무대가 이어받는다. 첫 번째 무대는 녹색으로 펼쳐진다. 주역에서 녹색은 동쪽이며 봄이며 수풀(나무)이다. 무대 좌우와 중앙, 바닥과 천정의 5면을 물들인 녹색은 오염되기 전 순수한 자연의 모습이다. 여인들의 녹색의상도 독특하다. 머리를 둥근모양리본으로 장식하고 직사각형 밴드를 둘로 나누어 어깨에서 허리까지 내려뜨린 현대적 상의에 푸근하게 펼쳐진 전통 치마를 받쳤다.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킨 의상처럼 춤사위 역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다. 녹색 무대는 붉은색으로 바뀐다. 붉은색은 남쪽이며 여름이고 불(火)이다. 인간사회와 번성한 도시문명을 상징한다. 승무의 장삼처럼 붉은 색 옷자락을 펄럭이는 여인들의 춤사위를 ‘장윤나’가 대표한다. 인류문명이 확대될수록 자연은 오염되고 도시화가 진행된다. 붉은색 다음에 등장하는 흰색은 서쪽이고 계절은 가을이다. 물(水)이 불을 끄는 것처럼 상처받은 세계를 치유하기 위해 흰옷의 무녀들(김원경, 김미애, 정현숙)이 등장한다. 살풀이춤과 같은 소생의 에너지가 죽은 자를 어루만지고 어둠에서 일으켜 세운다. 무대의 색깔은 검정색으로 바뀐다. 검정색은 북쪽이고 겨울이다. 검정색 도복을 입은 남성군무진이 택견을 시연한다. 택견은 부드러운 면과 강인한 면을 동시에 갖춘 우리의 전통무술이다, 택견춤을 잇는 강력한 남성군무에 이어 흑백으로 차별화된 ‘박기환’과 ‘이요음’이 무대 한 가운데서 시정 넘치는 춤을 마무리한다.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만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는 듯한 아름다운 듀엣이다. 동남서북중(東南西北中)의 5방으로 이어지는 색깔의 변화는 자연의 질서를 상징하고 전통적 동양사상인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뿌리를 둔다. 다섯 처용의 에너지 역시 오행에서 기인한다. 처용들이 다시 등장한다. 그들과 함께 활달한 남성군무가 펼쳐진 후 ‘박수윤’의 짧은 솔로가 아쉽게 피날레를 장식한다.

손인영이 ‘다섯 오’를 공개하면서 준비한 메시지는 선명하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무너진 자연 질서는 회복되어야 하고 그 해법을 5방처용무(五方處容舞)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용무가 벽사(辟邪)를 상징하듯 처용 춤의 뿌리가 된 음양오행설이 지구의 위기를 살려낼 수 있다는 주장이 논리적이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제5원소’(1997)를 떠올리게 하는 메시지가 읽혀진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 원소에 더해진 다섯 번째 원소가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한다는 플로트였다. 지구가 위기에 처한 원인은 외계인의 침공(제5원소)과 자연환경의 파괴(다섯 오)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해법을 찾은 영화의 결말은 지구(자연)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탈출구라는 다섯 오의 주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민선의 감각적인 무대미술은 이 작품의 백미다. 작은 사각형조각을 주렴처럼 달아내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가르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세련된 의상으로 자연의 순환을 설명하는 기교가 남기윤의 드라마트루기와 잘 어울린다. 가야금, 대금, 아쟁, 해금과 꽹과리 등 국악기만을 사용하면서 ‘장미’, ‘제례악-장미의 잔상’ 등에서 안성수와 여러 차례 실험적 앙상블을 이루어냈던 라예송의 창의적인 음악은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의 섬세한 춤과 어울리며 최고의 궁합을 보여주었다. 택견은 무형문화재(76호)로 등록된 전통문화지만 맨손격투기나 민속놀이로 잘 알려져 온 우리 무술이다. 안무가의 메시지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오방처용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라면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동양 각국에 전승되면서 택견과 함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태극권(太極拳, Tai chi)이 작품의 주제에는 더 근접하지 않았을까. 5방색 중 한가운데 위치하며 땅(土)과 종합을 상징하는 황색을 무대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재의 기근에 허덕이던 우리 무용계에 손인영이 제기한 ‘자연회귀’주제는 신선하다. 참신한 텍스트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교한 안무는 무대에 목마른 무용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최선의 조합이다. 국립무용단원을 거쳐 컬럼비아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예술단, 인천시립, 제주도립 예술 감독을 경험한 손인영이 국립무용단의 새로운 지평을 이룩해갈 것을 믿는다. ‘다섯 오’가 ‘해바라기’, ‘회오리’, ‘향연’ 등과 함께 국립무용단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살아남아 우리 시대의 소명인 자연보호의식을 깨우고 무용보는 기쁨을 배가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손인영 최고의 야심작을 보면서 그가 보여줄 다음 작품을 자연스럽게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