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네거리 '팽형'(烹形)이 있었네
종로 네거리 '팽형'(烹形)이 있었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10.01.0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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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아집만 내세우는 집단들에 시행해 봄직한

광화문 우체국 건너편 교보문고 앞에 놓인 '혜정교(惠政橋) 터' 표석은 볼 때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탐관오리를 물에 삶아 죽인 '팽형'(烹形)을 시행했던 곳이라는 설명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의 중심거리인 종로 네거리에서 백성의 삶을 어렵게 한 나쁜 관리를 잡아 '팽형'으로 다스렸다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통쾌하다.

팽형은 한마디로 '나쁜 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이다.

이 형벌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몽골의 징기즈칸 군대와 중국, 일본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시대 몽골 침입 때 저항군을 겁주기 위해 선을 보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선 그 형벌이 너무 가혹해 실제로 행한 것은 아니고, 죄인을 잡아다 물에 삶아 죽이는 시늉만 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종로 네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 죄인을 공개한 후 큰 가마 솥에 삶아 죽이는 시늉으로 절차를 마치면 그 죄인은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없었다.

일단 팽형을 당한 이는 살아있어도 사망신고가 되었으며, 일체의 사회구성원으로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사(假死) 상태에서 가족에 의해 수레에 실려가 실제 장례식이 치러졌다.

집안의 큰 수치로 여겨져 족보에도 죽은 이로 표시되었다. 모든 대소사에서 발언권도 없었다.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팽형이었으니 설사 시늉만 냈더라도 실제 삶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가 있었다. 가끔 팽형 당한 이가 시장에라도 나타나면 사람들은 "광목 8자가 걸어 다닌다"며 망인(亡人)취급을 했다고 한다.

그 아내가 임신을 해도 "과부가 어떻게 아이를 가졌네"라고 놀렸다. 조선말 한 일본인의 목격담 기록은 혜정교 팽형이 어떻게 집행됐는지 실감나게 전한다.

"종로 네거리 한 복판에 높다란 부뚜막이 임시로 설치되고, 그 위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큰 무쇠 솥이 걸린다. 아궁이에는 불을 뗄 수 있도록 장작도 준비됐다.

앞 쪽 병풍을 친 군막에는 포도대장이 앉아 심문할 자리도 만들어졌다. 이윽고 죄인이 나오면 포도대장은 죄인의 신상을 확인 후 선고문을 읽고, 집행을 명한다. 죄인은 묶인 채 솥 안에 넣어지고, 아궁이에 불을 떼는 시늉으로 집행이 완료된다.

다음은 가족들이 울면서 다가와 죽은 체 나자빠진 죄인을 수레에 싣고 가 장례를 치렀다."

호랑이 해 벽두부터 옛 형벌 '팽형'을 생각함은 평소에 쌓인 억울함이 많기 때문이다. 새해아침 한 여론조사를 보니 한국 사회의 문제로 양극화와 정쟁, 대통령의 독주 등이 지목되고 있다.

양극화의 근저엔 중산층 붕괴와 비정규직의 억울한 사연이 깔려있다. 정쟁이 꼽힌 것은 국민은 살아 남으려 아우성인데, 민생현안을 쌓아 둔 국회는 다툼만 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대통령의 독주는 아마도 4대강 사업 등 일방적 국정운영에 따른 갈등을 말함일 것이다.

말로는 '친서민' 하면서 실제는 부자를 대변하는 여러 정부 정책(복지 · 교육정책 등)도 국민 눈엔 고깝다. 가까스로  연말합의를 이루긴 했지만 재개발 · 재건축의 와중에 억울함이 도에 넘쳐 서울시청 안마당 '담요농성'을 벌여야 했던 용산 참사 당사자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세입자 등쳐먹는 재개발 · 재건축 · 도시환경정비 사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해엔 그 옛날 탐관오리 뿐 아니라 약자 괴롭히는 강자의 악법, 국민 고통을 외면하는 정치, 자기 생각만 옳다는 아집주의자, 아랫 사람  배려할 줄 모르는 막무가내 상사, 악덕 사주(社主)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모조리 한 데 엮어 종로 네거리 '팽형'으로 처리했으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