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Asian Fusion’과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정신성Ⅳ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Asian Fusion’과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정신성Ⅳ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1.10.2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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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홍지윤은 이 작품을 통해 헤어짐과 만남을 거듭하는 한 커플의 불행한 운명에서 가치의 혼돈으로 점철된 포스트모던 시대 모럴의 원형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화려해 보이지만 어딘지 서글픈 정서가 감도는 미장센은 화려하지만 곧 부패할 운명에 처한 꽃의 미래를 예감케 하는 듯해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홍지윤의 섬세한 시적 감수성이 배가된 분위기에서 그녀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홍지윤의 미디어 아트에 대한 관심은 2012년 백령도의 바닷가에서 벌인 퍼포먼스 영상작업****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영상작업은 이미 2천년대 초반에 여러 편의 에니메이션 단편 영화 제작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바닷가를 무대로 군복을 입은 여자 무용수(유소정)가 장고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벌인 한 판의 퍼포먼스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그녀는 남북 분단의 운명에 처한 한반도의 문제를 ‘한(恨)’을 주제로 비디오 영상과 그림, 설치미술을 통해 잘 소화해 냈고, 이는 영상미가 뛰어난 수작(秀作)으로 평가된다.

홍지윤의 그림은 자작시와 그림을 한 화면에 공존시킴으로써 문학과 회화의 교섭을 시도한다. 이는 비단 시서화 일체라는 동양의 전통을 따를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용인하는 그녀의 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지하듯이, 고대 희랍에서는 시와 그림을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란 유명한 발언을 통해 멀리서 봐야 할 그림과 가까이서 봐야 할 그림이 있는 것처럼, 시의 해석도 서로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원리가 전복되는 것은 ‘그림이 시를 모방하고(그림은 시와 같이:ut poesis pictura)’, ‘시는 그림을 본받도록 했던(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 근대의 예술원리가 태동하면서부터다.

홍지윤은 <인생은 아름다워> 연작을 통해 시와 그림의 통교(通交)를 시도함으로써 이미지뿐인 회화적 관례에 저항한다. 그녀는 시를 읽으며 그림을 보게 만들고, 그림을 보면서 시를 연상케 하는 형식을 통해 사랑과 같은 인간의 다양한 정서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흔히 이야기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말은 일종의 수사 내지는 허구일는지도 모른다. 이념과 종교, 피부색, 문화적 전통, 지리적 풍토가 서로 다른 아시아를 어떻게 하나의 가치로 통합할 것인가? 그러나 공감에 바탕을 둔 예술은 가능하다. 그러한 예술에 대한 홍지윤의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Asian Fusion’이란 개념을 고안케 했다. 그녀는 수없이 존재하는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적 형식에서 간극, 곧 ‘겹’을 찾아내고자 한다. 아시아에서 발원한 수많은 예술적, 미적 성과들이 지닌 겹과 결을 찾아내 이를 자기 작업의 원천으로 삼는 것, 그것은 홍지윤이 구사하는 수많은 조형언어와 매체를 통해 숙성될 것이다. 홍지윤은 말한다. “수많은 겹이 새롭게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술세계의 근본이다. ‘Asian Fusion’은 간극 사이에 존재하며 ‘겹’의 칼라풀한 시각화이다”라고.

홍지윤은 그녀 자신의 말을 빌리면, “삶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기록하고자 하며 이것이 바탕이 된 미술과 인문(人文)의 융합, 궁극적으로 ‘원융무애(圓融無礙)’를 추구하는” 동양의 한 예술가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놀이정신에 근간을 두고 있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주목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선비(Sunbi)는 조선시대(1392-1910)에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를 이르는 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매사 절제력이 강하다.

**<너에게 꽃을 꽂아줄게3(Let me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eart 3>(210x150cmx3폭), 2013

***2014년에 성남아트센터 미술관이 주최한 [한국화의 재발견전]에서 발표한 작품. Installation, ink & acrylic on Korean paper(Jangji)+single channel video+painted wooden cut, size : painting each 201x150cm, 3pieces+video, running time 2min 50 sec, variable size objects.

****홍지윤, <어진 바다-화려한 경계>(An Ocean of Mother Nature-Gogeous Border), single channel video, running time 6'00'', 2012

영화가 시작되면 파도의 포말이 밀려오는 백령도 바닷가 백사장 저 멀리서 한 여인이 장고 춤을 추고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바닷가 해변에는 빨랫줄이 걸려있고 거기에는 군복, 화가가 천에 그린 그림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사이로 간간히 트럭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여인의 춤은 점점 빨라지고 장구소리와 파도소리가 뒤섞여 애잔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상미가 일품인데, 여인(유소정)은 “어느 날은 꽃이 바다를 뒤덮고/어느 날은 바다가 꽃을 뒤덮고/바다같은 꽃이 바다를 채우네/꽃같은 바다가 바다를 채우네/어진 바다. 어진 꽃”이라는 애조 띤 노래를 부른다. 홍지윤의 꽃 그림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영화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