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한국인의 소리는 어떤소리의뿌리에서 비롯되었을까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한국인의 소리는 어떤소리의뿌리에서 비롯되었을까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1.10.2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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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1991년, 나는 아직 공산권 세계가 ‘죽의 장막’으로 서방 민주주의 세계와 대치되어 있던, 하지만 차츰 두 세계의 대치가 누그러져 그 경계가 조금씩 풀어져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몽골공화국의 몽골 국립극장 창설 6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말하자면 몽골 국립극장 <환갑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은 것이다. 당시는 한국과 몽골공화국이 국교가 열리지 않았던 때라 어떻게 그 초청장이 내게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는 채, 이화여대 독어독문과 교수실로 전달이 되어 있었다.

그 해 6월 초, 중순인 듯 기억이 된다. 1988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ITI(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 총회에서 만난 몽골공화국의 대표에게 준 내명함에서 연락선이 닿은 것 같았다. 그녀는 러시아어는 되고 영어·독일어가 안되고, 나는 몽고어와 러시아어가 안되니 난감한 채 미소와 심파티의 감정으로 서로의 따듯한 마음과 동질감이 교류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러시아어, 몽고어를 모르는 채 국제회의나 행사에 가서 교류와 소통을 한다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고,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내 신변에도 보호장치가 불확실하다 판단되어 그 초청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한 내 의사를 전달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마침 주몽골 한국대사께서 1년에 한 번씩 고국 한국에서 열리는 공관장 회의에 참석차 귀국하여 내 연구실로 연락이 되어 점심을 함께하며 한국 대표로 꼭 참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전했다. 몽골공화국의 '서방을 향한 최초의 오픈 국제 행사'니 통역이나 의전은 주몽골 한국대사관이 책임을 질 터이니 겁먹지 말고 꼭 이번 행사에 참석해 주기 바란다는 간절한 말씀이셨다. 더구나 모교 선배님의 권유이시라 혹 떼러 갔다 혹 붙인 기분으로 나는 겨우 승낙을 해드리고, 대사님은 큰 숙제라도 풀은 듯 기쁜 마음으로 주재지 몽골로 떠나셨다.

드디어 1991년 한겨울, 11월 28일부터 일주일간 열린 몽골공화국의 서방세계를 향한 국제공연예술제 및 몽골 국립극장 환갑 기념행사는 참으로 몽골 예술교육과 공연문화의 역사와 발전사의 면모까지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는 풍성하고도 성의를 다한 훌륭한 행사였다. 이를 참관하고, 많은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어 나의 개인적, 학문적 시계를 넓히고 온 뜻밖의 좋은 경험이었다.

몽골 최최의 극장 건축이 몽골인들의 주거 형식을 본떠 지은 <겔> 형식의 건축물 모형이었음이 내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컸다. 당시 200만이 좀 넘는다는 인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은 그들의 굴곡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버팀목은 그들이 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무궁한 자긍심으로 행사할 수 있음을 보았다. 나는 36년의 왜정 치하의 식민지 시절을 통해 꺾이고, 비틀어지고 왜소해진 한국인의 자존심의 상처가 언제 치유될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신비로움과 경탄으로 다가온 것은 그들의 <흐미>, 어디에서도 볼 수없고 흉내 낼 수 없는 소리예술의 독특함이었다. 마두금으로 동반되는 흐미는 인간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며 자연과 삶 속에서 위로와 즐거움, 그리고 절망과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그 소리는 여전히 자연으로 머물러있는 소리였다. 바이올린을 연상시키면서도 질박하리만큼 단순해 보이는 마두금으로 동반되거나, 아니면 소리예술가의 목소리 하나만으로 산천과 인간이, 천하와 천상이 하나가 되는 듯 했다. 소리예술은 내게 몽골의 어떤 예술보다도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흐미>를 대하고 내가 돌아본 것은 우리 전통의 소리예술이었다. 그 당시 나는 <판소리>에 심취해있었고 우리<가곡>, <가사>에 배어있는 독특함에 매료되어 있었다. 김소희, 김월하 선생님을 찾아 인터뷰도 하고, 그들이 소리를 내기 위한 사전의 몸 다스리기는 어떻게 하시는지, 그것을 공연예술인 후배들이 올바로 배우려면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기에 더욱 <흐미>의 독특함이 다가왔던 것이다. 특히 김월하선생님의 확트인, 그러나 거침없는 고우면서도 힘있는 소리는 천상과 지기를 아우르는듯 하여 나를 압도하였다. 

그러한 관심을 갖고 우리 전통의 소리를 후손들인 배우나 공연예술인들이 배우려면 어떻게 닦아가야 하는지 그 교육의 시스템은 가능한 것인지에 관심 있어 나는 1993년 여름방학부터 배우 훈련법을 교과과정으로 짰다. 김소희, 김월하 두 분을 모시고, 월하 선생님이 전수실을 빌려주셔서 배우와 공연예술인들의 <숨쉬기> <소리 내기> <말하기>에 앞서 <몸 다스리기>를 도입하여 훈련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작품 발표도 했다. 큰 성과가 확실하기에 한국 공연예술원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김월하 선생님은 너무도 즐겁게 교육에 임해주시며 행복해 하셨으나 김소희 선생님은 얼마 후 편찮아지시면서 성창순 선생님을 추천해주셔서 우리는 성창순 선생님과 한동안 꾸준히 공부하였다.

한민족에게는 어떤 다른 민족의 소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소리가 있다. 이를 잊지 않고 특히 각 나라와 민족의 독특한 소리가 호흡과 발성의 위치에서 자리매김 되어지며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 기술의 기본을 배운 다음에 자신의 창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그 힘을 발전시켜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만 문화재급의 소리꾼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명심해야만 진정한 예인이 탄생하는 듯하다. 멀고 긴 여정이지만 그 뜻있는 삶의 여정을 흠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