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류재준 교향곡 2번, 팬데믹 시대에 인간 존엄성을 노래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류재준 교향곡 2번, 팬데믹 시대에 인간 존엄성을 노래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1.10.27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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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음악제 개막공연 ‘종소리’ 대성황
12 첼리스트 등장하는 폐막공연 ‘회전목마’ 기대

10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국제음악제가 막을 올렸다. ‘종소리’란 부제가 붙은 이 날 개막 공연에서 관심이 집중된 작품은 단연 류재준의 교향곡 2번이었다. 작곡가의 열정과 기량을 모두 쏟아 부은 걸작으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5명의 성악가와 두 합창단이 연주하는 70분 길이의 대곡이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33번과 60번을 가사로 사용, <한여름밤의 꿈>, <오텔로>,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바탕을 둔 클래식 전통에 새로운 걸작 하나를 추가했다. 

▲서울국제음악제 개막작 ‘종소리’ 공연 모습
▲서울국제음악제 개막작 ‘종소리’ 공연 모습

류재준은 “셰익스피어가 흑사병으로 극장 공연이 중지된 상황에서 소네트들을 지었다는 데서 이 곡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회상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행복을 떠올리며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희망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팬데믹의 힘겨운 시대를 이겨내자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난치병과 싸워서 이겨낸 류재준의 고난과 극복, 그 결과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지휘를 맡은 랄프 고토니의 설명. “이 작품은 거대하다. 파도가 점점 커져서 거대한 폭풍으로 몰아친다. 먹구름 속에 숨었던 햇살이 다시 나타나 그 불행하고 암담한 감정을 서서히 몰아낸다. 밝고 재미있고 위트도 있지만, 무시무시한 곡이다. 나는 이 곡의 악보를 보면서 작곡가가 병마와 싸워 이겨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겪었던 고통과 투쟁이 음악에서 느껴졌다.” 

현악의 푸가로 시작하는 1악장은 류재준 특유의 비장한 서정미가 가득했다. 바로크 선법으로 삶의 빛과 그림자를 다채롭게 그려냈고, 다양한 푸가가 저음에서 고음으로, 고음에서 저음으로 종횡무진 펼쳐졌다. 팀파니와 콘트라바스의 대화는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드럼이 주도하면 금관, 목관, 현악, 타악 등 모든 파트가 잠에서 깨어나듯 화답하며 힘차게 물결쳤다. 중간 부분 피콜로와 플루트의 대화로 출발하는 푸가가 특히 아름다웠다. 2악장은 지난 추억을 되새기는 춤곡에 이어 개막 연주회의 주제인 ‘종소리’로 넘어간다. 소프라노 임선혜와 이명주가 등장, 셰익스피어 소네트 60번을 노래한다. “조약돌 해안으로 파도가 밀려가듯 우리 삶의 순간도 늘 끝을 향해 달려간다. 시간은 모든 젊음을 먹어 치우지만, 그 잔인한 손길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가치는 찬양받을 만 하다.” 

▲서울국제음악제 개막작 ‘종소리’ 공연 모습
▲서울국제음악제 개막작 ‘종소리’ 공연 모습

3악장은 랄프 고토니가 지휘하는 SIMF 오케스트라가 맘껏 기량을 발휘한 부분이었다. 변주와 발전을 거듭하며 어려운 시기를 걷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냈다. 피날레 4악장은 다섯 명의 독창자 - 소프라노 임선혜와 이명주,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테너 국윤종, 바리톤 사무엘 윤 - 와 국립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이 참여, 비극과 희망이 교차하는 클라이맥스를 이뤘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33번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은 수치스레 서쪽으로 도망가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위대하다.” 지금까지 류재준이 쓴 작품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사운드로, 비극적인 현실과 아름다운 축복이 교차하는 대위법의 향연이었다. 

다섯 독창자들의 노래는 수준급이었고 특히 바리톤 사무엘 윤의 음색이 호소력이 컸다. 사무엘 윤은 이 공연이 ‘스타워즈’라고 했다. 클래식계의 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음을 표현한 우스갯소리였다. 소프라노 임선혜는 “삶과 죽음, 시간의 의미를 노래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지금 우리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며, “종소리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정격종지를 선언하며 희망을 전하는 것 같다”고 연주에 참여한 느낌을 밝혔다. 랄프 고토니는 이 대규모 앙상블을 안정되게 잘 이끌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지만 선율과 화음이 단순 명료해서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2008년 폴란드에서 초연된 교향곡 1번 <진혼교향곡>을 뛰어넘는 성과였다. 펜데레츠키가 교향곡 5번 주제로 삼은 '새야새야 파랑새야'가 변형되어 나오는 걸로 보아 - 피날레에서는 말러 <티탄> 팡파레처럼 들린다 - 작년에 돌아가신 스승 펜데레츠키에 대한 오마쥬의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주시간 70분의 장대한 교향곡이 힘차게 마무리되자 청중들은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서울국제음악제 개막작 ‘종소리’ 공연 모습
▲서울국제음악제 개막작 ‘종소리’ 공연 모습

이 해체의 시대에 통합을 얘기하는 이런 교향곡이 나왔다는 게 놀랍다. 산산히 흩어져 침몰하는 이 시대에 류재준의 교향곡은 "인간은 여전히 존엄하다"는 신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류재준은 이 거대한 교향곡에 자신의 온 영혼을 쏟아 부었다. 그는 이 곡에서 "궁극의 음악에 한 발을 내딛었다"고 자부했다. 굳이 말꼬리를 잡을 생각은 없지만, 우리는 ‘궁극의 음악’이 뭔지 모르며,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사용하는 악기들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표준화한 오케스트라 편성이 최상인지도 우리는 모른다. 모차르트는 피아노 오중주곡 K.452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쓴 곡들 중 최고”라고 말했지만 이 곡 이후 더 훌륭한 작품을 많이 썼다. 그는 오페라 <돈조반니>나 교향곡 <주피터>가 ‘궁극의 음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류재준의 교향곡 2번은 규모가 커서 자주 연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곡이 19세기말에 나왔다면 정규 클래식 레퍼토리에 쉽게 합류했을 테지만, 해체의 시대인 21세기에 이 곡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다. 류재준이 ‘궁극의 음악’을 말한 것은 베토벤이 9번에서, 말러가 8번에서 자기 음악의 정점에 도달했듯 류재준도 이 곡을 통해 자신의 작곡 인생에서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듯하다. 류재준은 미래가 있다. 언젠가 교향곡 2번을 뛰어넘는 새로운 걸작을 쓰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올해 서울국제음악제는 ‘놀이동산’을 주제로 오케스트라부터 실내악까지 다양한 편성의 공연을 만나볼 수 있다. 30일까지 예술의전당, JCC아트센터,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되며 공연 시작 30분 전, 15분 가량의 프리렉처(Pre-Lecture)로 청중들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30일 저녁 7시반 롯데콘서트홀의 폐막 공연이 눈길을 끈다. 아르토 노라스, 양성원, 송영훈 등 12명의 첼리스트가 등장, 바흐-류재준, 아르보 패르트,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작품을 연주하는 ‘회전목마’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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