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의 인문학 파먹기] A3의 철자법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의 인문학 파먹기] A3의 철자법
  • 윤이현
  • 승인 2021.11.1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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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며칠 전, 일하다가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구급차를 타고 을지로에 있는 한 대학 병원에 이송되었다. 손목을 젖혀 여러 각도로 피를 뽑고,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엑스레이를 찍고서야 침상에 누워 진통제를 맞을 수 있었다. 정신이 조금씩 몽롱해져 왔고, 불규칙하던 호흡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직도 꿈에서 뭘 봤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분명 처음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 계셨고, 내게 자꾸만 손짓하며 얼른 도망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급기야 나를 차에 태우고서 한적한 시골의 한 공항에 내려주기까지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길가에 내려서 멍하니 있다가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A3 깨어나셨습니다.” 퇴원 수속을 밟는 내내 나는 A3라 불렸다. 병원 밖에서 마주한 엄마가 이현아라고 불렀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이름이 윤이현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코드 번호가 아닌 원래의 나로 돌아가, 3개월 할부의 진료비 영수증을 들고 있는 작고 주름진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추운 가을의 적막을 밟고서.

하루 이틀 쉬니, 오래간만의 휴식이 따분하고 무료하기만 해서 친구에게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진로 이야기, 서로의 연애사에 대해 묻고 조언을 구하던 찰나, 친구는 자존감이 높은 내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 친구가 보기에 나는 꽤 쿨하고 씩씩하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듯 보였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쁨과 어딘지 모를 아주 작은 혐오감이 일렁였다. 그때 애써 꼭꼭 씹어 삼켰던 밥과 약을 토해내고 싶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지난날,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이 연상되며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났다.

사실 모두에게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쓰러지던 그 날의 매분 매초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다단계 업체로부터 입사 제의가 왔던 날이었다. 재수가 없다며 귀를 씻고 집을 나선 순간 배가 아파 왔다. 귀에 큰 소리로 맞춰둔 이어폰을 꽂고 통증을 무시하려 애를 썼다. 그렇게 낯선 곳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로 가득 찬 매장이었다.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차분히 일을 시작했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었다. 손끝과 발끝이 따가웠고 점점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쟁반에 음식을 놓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기어가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담배를 피러 나온 직원이 발견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내가 애써 모른 척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다행히 몸은 정상이었다. 그 말을 듣고 다행이라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던 엄마의 따뜻한 체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까의 끔찍했던 기억도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던 온기였다.

 

나는 나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뱉은 첫마디는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고,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은 나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해서, 오늘도 나는 소중한 친구 앞에서마저 씩씩하고 당찬 척을 하며 뒤를 돌아 울었다.

 

친구에게 했던 말과 달리 이제껏 나의 연애는 비겁했다. 늘 먼저 숨고 도망치는 형태로 마무리가 됐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건 불편했고, 사랑을 건네는 일은 비참했다. 당차게 선언했던 것과 달리 나는 적성을 찾지 못했다. 이제껏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밤마다 고민으로 뒤척이곤 한다. 밖에선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편하지 못하게 사는 엄마 아빠가 안쓰럽고, 또 안쓰러웠다. 돈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친구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그리고 너무 외로워서, 공허해서 돈을 썼다. 돌이켜보니 이룬 게 없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여행, , 영화 그 무엇도 나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게 없었다. 나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친구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어지러움을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강해 보이고 싶어도 실은 강하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인정한다. 스스로를 미치도록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마음 한편에선 나를 망치고 싶어 했다는 것도. 이제야 지난 나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A3라는 호칭이 줬던 안락함과 병원을 나섰을 때의 쓸쓸함 그리고 친구 앞에서 느꼈던 현기증 따위의 것들이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누군지도 모를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도망치라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던 것은 무의식이 내게 전하는 말이었음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지난 연애에서 이토록 부끄러운 나를 알게 해줬던 분들에게,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유 없이 손을 내밀고 온기를 주는 엄마 아빠에게, 그리고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이 말을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더 나아질 방법을 몰라서 이 글을 쓴다. 마음의 통증마저 무시하고 나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