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프리뷰]MMCA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展, 겹겹이 쌓인 담담한 속울음
[현장프리뷰]MMCA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展, 겹겹이 쌓인 담담한 속울음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1.11.1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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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22.3.1, MMCA 덕수궁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이래 첫 박수근 개인전
윤범모 관장 “생애 다시 볼 수 없는 박수근 전시일 것”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조용한 서정, 한국적인 감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박수근을 2021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전시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 개최된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과 공동주최해 MMCA 덕수궁관에서 11일부터 내년 3월 1일까지 전시를 연다. 개막에 앞서 지난 10일에 언론간담회가 진행됐다.

▲박수근, 쉬고있는 여인, 개인소장 (사진=MMCA 제공)
▲박수근, 쉬고있는 여인, 개인소장 (사진=MMCA 제공)

간담회에 참석한 윤범모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이래 처음으로 개최하게 된 ‘박수근 전시’임을 강조하며 전시를 준비하기까지 있었던 많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윤 관장은 “국내 소장문화는 자신의 소장품을 잘 드러내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며 “박수근 작품의 소재지를 찾기 힘들었을 뿐더러, 고가의 작품이 많아 대여나 보험료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도와준 많은 분이 ‘앞으로는 이런 협조를 안 할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며, 박수근의 진면모가 농축된 작품만 엄선해서 만든 이번 전시는 '다시 보기 어려운 전시일 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박수근의 1933년 19살 작품부터 말년 1964년 50세 작품까지 모두 아우른 이번 전시는 박수근 그림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기회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 박수근 드로잉부터, 박수근만의 우둘투둘한 마티에르가 농축돼 있는 말년 작품을 한 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다. 4부로 이뤄진 전시장을 지나면서 회백색의 겹겹이 덧칠된 작품 면면에 스민 정서와 내러티브를 깊이감 있게 읽어볼 수 있다.

총 4개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구성됐다. 연대기적 구성이 아닌, ‘독학’, ‘전후(戰後) 화단’, ‘서민’, ‘한국미’라는 키워드를 주제 삼아 구성돼 전시관 별 다양한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3부 공간의 경우 MMCA 덕수궁관 바로 직전 전시인 《DNA: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의 전시구조물을 재활용했는데, 서울 도심 골목길을 누비는 듯한 전시관 구성을 이끌어내 작품의 감상을 보다 공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3전시실 봄을 기다리는 나목, 서울 골목길을 거니는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MMCA 제공)
▲3전시실 봄을 기다리는 나목, 서울 골목길을 거니는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MMCA 제공)

이번 전시에는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에 이르는 총 174점의 작품이 공개된다. 이 중 유화 7점, 삽화 12점은 미공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된다. 미공개 유화 7점 중에는 이건희 컬렉션 작품 5점이 속해 있다. 간담회에서는 이전에 있었던 박수근 전시보다 확연하게 많은 작품 수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며, 현재 남아있는 박수근 작품 수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현재 조사된 박수근 작품은 500점 가까이 되고, 이중에는 파악만 됐을 뿐 현존 유무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작품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학예사는 “이번 전시를 준비할 때, 지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으로 시행된 박수근전작도록 발간사업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과 연구 성과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라며 “사업 당시 작품 실물이 확인되지 않은 것을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찾기도 했고, 누락 작품도 발견되는 등 박수근의 작품은 지금도 계속 해외경매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전업화가이자 외국인 컬렉터의 사랑을 받았던 박수근

박수근은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미감, 서민들을 주요 도상으로 삼아 ‘선한 화가’, ‘신실한 화가’, ‘이웃을 사랑한 화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는 수식어로 설명되곤 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박수근을 오랫동안 설명해왔던 그 수식어구들을 걷어낸다.

박수근은 집안 사정으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정 살림을 도맡아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그림 또한 독학으로 공부했고,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와 같은 관전을 통해 화가로 데뷔했다. 제도권 교육과 거리가 있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그의 그림 역시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에게는 당시 화단의 파벌주의로 인한 냉대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불우한 화가였다는 고정관념이 쉽게 씌어졌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이미지를 걷어내고 그 속을 파고들어, 박수근의 새로운 면면을 소개한다.

전후(戰後)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비싼 유화 물감을 아낌없이 사용한 작가다. 겹겹이 칠한 유화 물감으로 인해 작품 역시 무게가 상당한 편이다. 그에게 씌워진 불우했다는 고정관념이 박수근 이미지 전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박수근, 고목과 여인, 리움미술관  (사진=MMCA 제공)
▲박수근, 고목과 여인, 리움미술관 (사진=MMCA 제공)

박수근은 전쟁 후 미군부대 내 PX에서 싸구려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당시 박수근이 그렸던 초상화는 싸구려 스카프 귀퉁이에 그려지는 작은 그림이었다. 이 시기는 박수근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온갖 수모를 견뎌내야 했던 때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을 아끼는 후원자들을 만나게 해준 장소를 경험하게 한 때이기도 했다. PX에서 만난 후원자들과 교류하며 그림을 판매했고, 그림 값 대신 재료를 받아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고 한다.

김 학예사는 “박수근은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전업 작가였다”라며 “박수근의 그림이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토대였다”라고 말했다. 실제 박수근은 반도화랑에서 많은 수의 작품을 팔았고, 미국 컬렉터들에게 주목받는 당대 명실상부한 중견작가 중 한 명이었다.

덧붙여 김 학예사는 박수근이 판매를 위해 제작한 작품과 관전에 출품하기 위해 작업한 작품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봐야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판매를 위한 작품의 경우, 소품이 많고 잘 팔리는 도상을 반복적으로 제작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점은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에 전시된 이건희 컬렉션 <춘일(春日)>이라는 동명의 두 작품에서 확인된다. 이 두 개의 작품에는 반도화랑에서 판매됐음을 증명하는 라벨이 붙어 있다. 이점을 통해 한국적인 정취가 있는 박수근 특유의 작품은 외국인의 취향이 들어가 반복적으로 제작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관전에 출품한 작품 경우 이러한 경향과 달리 완성도 높은 대작들도 많이 보이고, 화면 내 과감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도 찾아볼 수 있다. 김 학예사는 박수근이 화면 구성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치밀하게 계산해 배치하는 점을 눈여겨 볼 지점이라고 꼽았다. 박수근 작품은 일견 단순화된 형태로 구성돼 있지만, 하나의 소재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파고들어 소재에 가장 강렬한 부분만 선별해 표현한 지점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박수근이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기에, 주요 소재를 계속 반복해서 그리는 방법으로 작품세계를 연습해왔다는 평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반복적인 사용은 박수근이 하나하나의 소재를 정말 오랫동안 살피면서 대상의 미학을 찾아나갔다는 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목’이라는 소재는 박수근 특유의 화법과 맞물려 더욱 빛을 발휘한다. 박수근은 노년에 이르러선 물감으로 나무의 표면을 표현하기까지 이른다. 4부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1961년 작품 <고목(古木)과 여인>이 그러하다. 이외에 박수근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3부 전시실에 1961년 작 <꽃피는 시절>과 4부 전시실에 1970년대 후반 작품 <웅크린 개> 등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웅크린 개' (사진=서울문화투데이)
▲1970년대 후반 '웅크린 개' (사진=서울문화투데이)

박수근‧박완서‧한영수, 평범한 사람들의 예술…지금을 위로하다

전시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박완서 소설 『나목』을 기획의 주요 근간으로 삼아 시작된다. 박완서는 미군부대 PX에서 박수근을 만나고, 이후 그의 유작전을 통해 박수근의 죽음을 알게 된다. 박완서는 박수근에 대한 전기를 쓰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알고 지낸 지는 1년 미만이었고 작품을 써내려갈 수록, 소설로 풀려나가는 글의 방향을 좇게 됐다고 한다. 전시에서는 박완서가 기록한 박수근에 대한 글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 특히, 2부 <미군과 전람회> 공간에서 그 시간을 촘촘하게 헤아려볼 수 있다.

김 학예사는 2부 전시공간을 이번 전시의 백미로 꼽았다. 간담회에서도 2부 전시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할 수 있는 1954년 작 <길가에서(아기업은 소녀)>에서 많은 취재진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박수근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아기를 업은 소녀는 전시실 처음부터 담담한 서정을 뿜어내고 있다. 전쟁 직후, 황폐해졌지만 그래도 삶을 살아가야 하는 서민의 묵묵함과 어린 생명들의 생장이 아주 담담하게 눌려져있는 작품이었다. 이 공간에선 박수근에게 하나의 큰 전환기를 가져다 준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1951년작 <집>과 박완서 소설 『나목』의 주요 소재이자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된 1962년작 <나무와 두 여인> 작품을 볼 수 있다.

▲2부 전시실 '길가에서(아기업은 소녀)' 앞에 몰려있는 취재진 (사진=서울문화투데이)
▲2부 전시실 '길가에서(아기업은 소녀)' 앞에 몰려있는 취재진 (사진=서울문화투데이)

<나무와 두 여인> 앞에는 관람객이 작품을 편히 감상할 수 있도록 의자도 마련돼 있다. 전시장 중심부에 배치돼 정갈하면서도 묵직한 감정을 뿜어내는 이 작품은 쓸쓸해보이면서도 따뜻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다. 화가이자 평론가인 정규는 고목이 서 있는 마을을 무대로 한 연극을 보는 듯하며, 그 이야기는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같다고 했다. 걸어가는 아낙네의 시선과 그 아낙을 쳐다보는 여인, 화면 중심에 과감하게 배치된 나목등은 단순히 화면에 놓인 것이 아닌 끈질긴 시선의 길과 여운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는 박수근의 새로운 면을 찾아내면서,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박수근과 중년이란 나이에 상업여성지로 등단해 섬세하고 현실적인 서민의 삶을 그려낸 박완서, 리얼리즘 사진을 추구했지만 우리네 일상을 아주 가깝게 사랑했던 한영수 등을 이끌어내 ‘평범함이 전하는 가치’를 얘기한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리움미술관 (사진=MMCA 제공)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리움미술관 (사진=MMCA 제공)

언제나 혼란은 존재한다. 특히 전후(戰後)시대는 더한 혼란과 절망이 일상 면면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한국적이자 외국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이 태어났다. 전시 마지막에는 박수근이 직접 쓴 글이 소개된다. “나는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도 채 오기 전에 봄 꿈을 꾸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하지만 겨울을 껑충 뛰어넘어 봄을 생각하는 내 가슴에는 벌써 오월의 태양이 작열합니다”라는 글이다. 유례없는 팬데믹을 겪고, 그 파장을 견디고 있는 시대에 이번 전시는 박수근이 쌓은 겹겹의 화폭으로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