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드보르작, 미국에서 보낸 3년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드보르작, 미국에서 보낸 3년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11.1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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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신세계에서>와 첼로 협주곡 B단조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드보르작은 체코의 시골 넬라호제베스에서 14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7살 드보르작은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면 마당에서 바이올린으로 폴카나 왈츠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귀엽다고 동전을 주면 부모에게 조르르 달려와서 웃어 보이는 꼬마였다. 드보르작은 위대한 작곡가 중 푸줏간 면허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고, 이 가업을 맏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12살 소년 드보르작은 아버지를 도우려고 송아지를 끌고 오다가 진흙탕에 쓰러지기도 했다. 훗날 영국 언론은 드보르작을 인터뷰하면서  “드보르작, 푸줏간의 칼 대신 지휘봉을 잡다”로 제목을 뽑았다. 

아버지는 치터 연주를 잘 했고 직접 춤곡을 작곡해서 연주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지만 맏아들이 음악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어머니와 외삼촌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꾼 아버지의 허락으로 드보르작은 12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6살에 음악가의 꿈을 품고 프라하로 갈 때, 아버지와 아들은 손수레에 짐을 싣고 프라하까지 35Km 먼길을 함께 터덜터덜 걸어서 갔다고 하니, 무척 정겨운 풍경이다.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은 출판사가 자기 이름을 독일식으로 ‘안톤 드보라크’(Anton Dvorak)로 표기하자 항의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한 젊은이였다. 그는 20대에 스메타나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모차르트 · 베토벤 · 슈베르트 · 바그너 음악을 공부하며 자기 세계를 다져 나갔다. 32살 때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한 드보르작은 아직 작곡가로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소시민들이 사는 임대주택을 빌렸고,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해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고, 틈틈이 피아노 레슨까지 하며 아기들을 키웠다. 결혼 3년째인 1875년, 드보르작은 빈 정부가 ‘젊고, 재능 있고, 가난한’ 예술가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됐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거장 요하네스 브람스가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이제 드보르작에게 작곡가로 활짝 피어날 길이 열렸다. 

드보르작을 국제무대에 알린 사람은 브람스였다. 두 사람의 출세작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춤곡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브람스는 <헝가리 무곡>을 펴내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 준 짐로크 출판사에 드보르작을 소개했다. 짐로크는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드보르작에게 의뢰, 8곡의 <슬라브 무곡> Op.46을 출판했다. 이 곡은 원래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1878년 출판하자마자 크게 히트했고, 같은 해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드보르작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렸다. 드보르작은 1886년 짐로크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8곡의 <슬라브 무곡> Op.72를 또 발표, 역시 크게 히트했다. 이 2집은 원숙한 드보르작의 풍부한 감성, 차분한 선율, 매끄러운 화성 등 1집에서 느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원 교수 시절 험상궂게 생긴 얼굴 덕분에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학생들은 그를 보면 “불독 지나간다”며 킥킥대곤 했다. 드보르작은 학생들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그래, 나 불독 맞다, 음악을 섬기는 불독이지.” 학생들이 볼 때 드보르작은 종잡을 수 없는 교수였다. 작곡 실습 시간에 곡을 제출하면 “쓸데없이 복잡하다”며 간결히 고쳐오라고 요구했고, 교수의 지적대로 고쳐 오면 “아무 내용도 없는데 이게 무슨 음악이냐”며 퇴짜를 놓곤 했다. 한번은 수업 중 모차르트 얘기가 나왔다. 드보르작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차르트는 누구인가?” 대답하는 학생이 없자 드보르작은 앞자리 학생의 팔을 붙들고 창가로 끌고 가서 유리창을 열어 제치며 말했다. “모차르트는 저 태양과 같은 존재다.” 

드보르작의 성공은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1892년 자네트 서버 여사가 그를 뉴욕 국립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한 것은 그를 세계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드보르작이 미국 땅을 밟은 1892년 9월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지 만 400년으로, 그의 환영 행사는 ‘두 개의 신세계 - 콜럼버스의 신세계가 음악의 신세계를 만나다’란 제목으로 성대하게 열렸다. 

미국에는 아직 ‘미국 음악’이라 할 만한 전통이 없었다. 조지 거슈인이나 아론 코플랜드 같은 미국 작곡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드보르작을 뉴욕 국립음악원의 학장으로 초빙한 것은 미국 클래식 음악의 시조가 되어 달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였다. 자네트 여사가 제시한 연봉은 15,000달러였는데, 이 금액은 당시 환율로 치면 드보르작이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는 연봉의 25배였다고 한다. 자네트 여사는 음악원에 흑인 학생도 받아들인 진취적인 인물로, 드보르작이 미국 음악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드보르작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물론, 미국 원주민과 흑인 영가의 음계와 리듬을 열심히 연구하여 자기 음악을 풍요롭게 했다. 드보르작은 “흑인 영가야말로 미국 음악의 중추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며 “흑인들의 노래는 부드럽고 열정적이며,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대담하고 유쾌하다”고 예찬했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는 1893년 12월 15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 초연됐다. 이 작품은 산뜻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으로 ‘교향곡은 심각하고 재미없는 음악’이란 편견을 단숨에 무너뜨렸고(최은규 <교향곡>, p.400), 서양음악 어법에 미국 원주민과 흑인들의 선율과 장단을 얹어서 빛나는 보편성을 획득했다. 신대륙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4악장의 주제는 스포츠 응원가로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2악장의 주제는 합창으로 편곡될 정도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초연 후 100여년 지난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랑받는 교향곡 중 하나다. 

1악장은 '라르고‘의 서주로 시작한다. 호른의 시그널과 장엄한 투티는 낯선 땅에 도착한 불안한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알레그로 몰토(아주 빠르게)에 등장하는 호른의 첫 주제는 이 작품에 계속 변형되면서 나타나 곡의 유전자 역할을 한다. 두 번째 주제는 흑인 영가풍의 애수어린 선율이며, 플루트가 나지막히 연주하는 G장조의 모티브는 <스윙 로, 스위트 채리어트>라는 흑인 영가를 닮았다. 2악장 ‘라르고’는 장중한 서주에 이어 잉글리시 호른이 유명한 <꿈속에 그리는 내 고향>을 연주한다. 뉴욕 초연 때는 이 선율이 너무 아름답고 애절해서 손수건으로 눈물로 닦는 부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윌리엄 피셔는 이 주제에 가사를 붙여서 <고잉 홈>이란 노래를 유행시켰다. 

3악장 ‘스케르초’는 인디언 부락에서 흐드러지게 펼쳐지는 춤판을 떠올리게 한다. 흥겨운 리듬이 난무하고, 이어서 우리 민요 <몽금포타령> 비슷한 선율이 등장,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콘 푸오코’(빠르고 격정적으로), 현악의 강력한 서주는 기차 소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드보르작은 증기 기차를 보면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기차 매니아였는데, 이러한 그의 취향이 반영된 대목이다. 이어서 스포츠 응원가로 널리 불리는 귀에 익은 주제를 호른과 트럼펫이 힘차게 연주한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회식 자리에서 “노래야 나오너라 빰바라빰빰,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빰바라빰빰~~” 하던 바로 그 선율이다. 교향곡은 1, 2, 3, 4악장의 주요 모티브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감동의 대단원을 이룬다. 

교향곡 <신세계에서>는 미국의 음악애호가들을 열광시켰다. 초연 직후 뉴욕 타임스는 “이 새로운 교향곡은 미국에도 예술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크게 반겼다. 그러나 이 떠들썩한 반응에 드보르작은 담담히 대답했다. “이것은 체코 음악이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미국 언론인 헨리 크레빌은 썼다. “드보르작이 미국 음악계에 있었던 1892년~1895년의 기간은 우리 미국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천사와 함께 기거한 세월이었다.” 자네트 여사는 훗날 말했다. “내가 한 일 중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일은 드보르작 박사를 미국으로 모셔온 것이다.”   

드보르작이 미국에서 쓴 또 하나의 걸작은 첼로 협주곡 B단조다. 이 작품은 장대한 규모와 고귀한 정서로 듣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드보르작은 뉴욕에 머물던 1894년 11월 이 곡에 착수했는데, 바로 그 때 처형 요제피나 체르마코바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서 이듬해 2월 완성했다. 드보르작이 하루 빨리 체코에 돌아가고자 한 것은 그녀의 임종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낭만시대 첼로 협주곡의 최고봉인 이 작품을 존재하게 한 요제피나는 과연 누구일까? 

그는 여배우 시절인 1865년 드보르작과 같은 극장에서 일했고, 피아노 레슨을 주고받으며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드보르작은 그에게 <사이프리스>라는 연가곡을 바쳐서 애틋한 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귀족인 카우니츠 공과 결혼했고, 드보르작은 얼마 후 그의 동생인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했다. 드보르작은 카우니츠 공작부인이 된 요제피나와 평생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다. 

드보르작은 이 곡의 2악장에 요제피나가 생전에 좋아한 <네 개의 가곡> Op.82 중 첫 곡 <홀로 있게 해 주세요>의 주제를 넣어서 그를 기렸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드보르작은 이 협주곡 피날레의 끝 부분에 <홀로 있게 해 주세요> 선율을 넣어서 애도의 마음을 한 번 더 표현했다. 이 곡을 초연한 첼리스트 하누스 비한은 기술적인 이유로 여러 군데 수정을 요구했지만 드보르작은 극히 일부분만 고쳤다. 특히 피날레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드보르작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피날레는 마지막 호흡처럼 디미누엔도로 사라지다가 오케스트라가 크레센도로 이어받아서 폭풍처럼 끝나야 하며, 이 아이디어는 타협할 수 없다.” 요제피나의 임종에 바치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대목이기 때문이었다. 

1악장 ‘알레그로’는 영웅적인 주제를 클라리넷이 제시하고 이를 현악 파트가 받아서 발전시킨다. 호른이 연주하는 두 번째 주제는 인디언의 전통 선율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서정적 멜로디로, 전통 5음계로 된 우리 가곡 <뱃노래>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 간다” 대목과 비슷하다. 2악장 ‘아다지오 마 논 트로포’(느리게, 하지만 지나치지 않게)는 클라리넷이 부드럽게 주제를 노래하면 첼로가 이어받아 고귀하고 우수어린 정서를 펼친다. ‘노래하는 악기’ 첼로의 서정성과 드보르작의 고결한 사랑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대목이다. 파국을 알리듯 오케스트라가 통곡하고 울부짖으면, 첼로 솔로가 <홀로 있게 해 주세요> 주제를 두 번 변주한다. 3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는 흑인 영가 선율과 보헤미아 민속춤의 리듬을 활용한 찬란한 피날레다. 고귀하고 영웅적인 정서가 춤추듯 펼쳐지고, 마지막 대목에서는 드보르작의 지시대로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로 사라지다가 다시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고양된 뒤 단호하게 마무리한다.     훗날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이 협주곡을 듣고 “이런 곡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내가 작곡했을 텐데…” 탄식하며 후배의 걸작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순간 브람스의 뇌리에 자기 첼로 소나타 Op.99을 초연한 친구 첼리스트 하우스만의 얼굴이 떠올랐음 직 하다. 브람스는 그를 위해 첼로협주곡을 써 주겠다고 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늙은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이 협주곡보다 더 나은 곡을 쓸 수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 협주곡에 삽입된 <홀로 있게 해 주세요>는 원래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가곡이지만, 크리스티안 폴테라가 첼로 독주곡으로 편곡한 것도 자주 연주된다. 

드보르작이 프라하에 돌아온 것은 1895년 4월 27일, 요제피나가 세상을 떠난 것은 한 달 뒤인 5월 27일이었다. 따라서 드보르작은 그의 임종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환갑을 넘긴 드보르작은 최후의 걸작인 오페라 <루살카>를 쓴 뒤 1904년 5월 1일 체코인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