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창극, ‘영웅서사’에서 벗어나 ‘동시대성’을 확보하다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창극, ‘영웅서사’에서 벗어나 ‘동시대성’을 확보하다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1.11.18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라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브랜드공연 ‘달의 전쟁 : 말의 무사 이성계’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1986년 10월 15일,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초대원장 황병근, 이하 전북도립국악원)이 개원했다. 개원 초기부터 교육프로그램이 강했다. 교수진이 참으로 훌륭했다. 1980년대 후반, 방송 취재 차 전북도립국악원을 방문했을 때, 수강생의 수준과 열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전북도립국악원’하면 이렇듯 교육과 연관된다. 그러다가 연주회가 점차 늘어났다. 전북도립국악원 하면 ‘창무극’이란 단어가 연결되었다.  

1990년 12월 15일, 전북도립국악단이 서울나들이를 했다. 창무극 ‘하늘이여 땅이여’(호암아트홀)는 여성국극 전성기(1950년대, 1960년대)에 이름을 날린 김향의 대본과 연출이었다. 정철호 작창, 박범훈 음악이 함께했다. 민요와 판소리를 주축으로 한 ‘전통예술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었다. 이 시절 국립창극단과 전북도립국악단의 차이는 아주 분명했다. 전북도립국악원의 존재가치는 분명했다. 

1995년 8월 25일, 창무극 ‘호남벌의 북소리’(국립극장)로 서울나들이를 했다. 태인 출신 의병장 임병찬의 일대기로, 김승규 대본, 박병도 연출이다.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한 작품이었다. 창무극(唱舞劇)이란 장르명처럼 판소리와 무용에 비중을 두었다. 기존 창극과는 다르게 ‘관현악’에도 비중을 두었다.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이하 ‘전북도립창극단’)의 최고 히트작은 창무극 ‘춘향전’이 아닐까? 1994년 6월 11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했다. ‘춘향전’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지만, 전북도립창극단은 좀 달랐다. 여러 도시를 순회했고, 제12회 아시아경기대회(히로시마)에 초청되었다. 

1990년대의 전북도립창극단의 ‘창무극’은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선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국립창극단’과 ‘전북도립창극단’과 많이 다르길 바란다. 그 바람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전북도립창극단의 ‘달의 전쟁 : 말의 무사 이성계’ (이하 ‘달전’)은 54회 정기공연이다. (11. 5 ~ 6.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그동안 50편이 넘는 작품을 정기공연에 올렸지만, 사실 기억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이건 단지 ‘전주’ 지역에서 공연해서 못 봐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 같다. 전국의 판소리와 창극의 애호가들은 ‘전북도립창극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극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북도립창극단의 공연이 ‘창무극’이길 희망한다. 소리와 무용이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러하기에, 우선 ‘판소리’를 크게 살려주길 바란다. 창극에서의 국악관현악 반주를 간과하는 게 아니다. 소리를 더 살리는 창극이 많아지길 바란다. 특히 전북도립창극단에는 ‘대통령상’에 빛나는 명창이 두루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달전’에서도 극 중에 판소리에 집중되는 소리를 할 때, 객석에선 추임새의 호응이 있었다. 이게 바로 ‘전북도립창극단’ 특유의 힘이다. 

둘째, 무용이 큰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달전’에서 제일 칭찬해주고 싶은 건 ‘무대’(무대디자인 남경식)다. 오직 구조물 하나만을 만들어 놓고, 회전무대를 통해서 그것을 ‘변형’시키면서 작품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대형뮤지컬에서의 ‘과잉된 세트’와 기존 창극에서의 ‘상투적 구조물’이 모두 아니었다. 무용수는 보다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구조물을 이용하면서, 여러 상황을 춤적 동작으로 만들어냈다. 채향순(안무)의 다년간의 내공이 빛났다. 객원 무용이 포함된 무용단과 역시 객원 무술이 포함된 무술단(지무단)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전북도립창극단의 ‘달전’은 ‘다른 창극’이다. ‘좋은 창극’에 동의는 안 할지라도, ‘새로운 창극’에 동의를 해야 한다. 전북도립국악원에서 제작했던 작품 제작 시스템과도 다르다는 점이다. 입과손스튜디오(이향하, 김소진, 이승희, 김홍식, 유현진)이 ‘각색 – 연출 – 음악’에 참여를 했다. 일찍이 ‘사천가’를 비롯해서 ‘소극장 창작판소리’를 개척한 인프라가 기성 창극단과 만나서 국악관현악과의 조화를 꾀한 작업이다. 이렇게 제작시스템이 달랐고, 따라서 창극의 결과물도 다르고 신선했다.  

창극은 훌륭한 장르이지만, 늘 ‘동시대성’과 거리감이 있다. 이번 ‘달전’은 무대 세트를 비롯해서 ‘대본’까지 곱씹어보면 현재와 상통(相通)에서 감정 이입할 것이 참 많다. 무엇보다도 창극의 재미를 위해서, 품격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 박수를 보낸다. 지면의 한계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달전’에는 매우 훌륭한 사설(대사, 곡조)과 관객들이 공감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장면이 포진되어 있다. 

‘달전’은 창극의 제작시스템에 있어서 ‘각색 – 연출 – 음악’이 삼위일체될 때 얼마만큼 작품적(예술적)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가를 알려준 작품이다. 아울러 전북도립창극단 단원들의 우수한 기량을 새삼 확인했다. 김도현(이성계)에 버금가게, 박현영(한월)의 무대 장악력도 좋다. 말의 정령으로 분한 김정훈과 고승조도 주목할만 하다. 최경희(점쟁이 아낙)은 ‘달전’의 씬스틸러였다. 하인 3인방(최현주, 차복순, 배옥진), 북방아낙(김세미, 박영순, 최삼순, 장문희)도 좋았지만, 배우로서 감정을 좀 더 절제했다면, 관객들의 감동은 더 컸을 것 같다. 대신 4인방(고양곤, 박건, 김성렬, 김광호)도 ‘달전’의 작품적인 윤활유로서 최고였다. 모든 배역과 모든 상황이 존재적 가치가 있는데, 이건 역사적으로 그러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렇다. 따라서 나는 ‘달전’이 ‘동시대성’을 확보한 창극이라고 주장한다. 이성계가 등장했지만, 이건 영웅서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