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몬트리얼 콩쿠르 우승자 김수연 귀국 독주회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몬트리얼 콩쿠르 우승자 김수연 귀국 독주회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1.12.0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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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값진 것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
콩쿠르의 터널 지나 더욱 성숙한 음악가로 성장

김수연, 이 젊은 피아니스트를 주목하라! 그는 음악적 지성과 표현력이 탁월하다. 소탈하고 정직한 품성이 음악에 자연스레 배어난다. 우리나라가 낳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 눈부신 요즘, 뚜렷한 개성의 신세대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김수연의 이름을 기억하자. 12월 첫날 예술의전당 IBK홀, <스타인웨이 위너콘서트>의 주인공은 김수연이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을 졸업한 그가 올해 5월 제19회 몬트리얼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고국의 팬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자리였다. 

▲피아니스트 김수연

연주회장은 떠들썩하지 않았다. 객석은 깜짝 스타를 보려는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피아노를 사랑하고 김수연을 아끼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음악을 나누는 오붓하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1부는 몬트리얼 콩쿠르 파이널에서 연주했던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2번 G#단조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전곡이었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는 쇼팽의 영향으로 낭만적 서정성이 넘치는 곡인데 김수연은 유연한 호흡으로 청중들을 꿈결 같은 환상으로 이끌었다. 라벨은 김수연의 맑고 투명한 음색이 잘 어울리는 곡이다. 김수연은 베르트랑 원작의 ‘물의 요정’(Ondine), ‘교수대’(Le Gibet), ‘스카르보’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연주하는 것 같았다. 라벨의 피아노곡 중 가장 어렵다는 ‘스카르보’는 정령들이 은은하게, 넘실넘실 춤추는 듯 했다.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 라벨 <밤의 가스파르> (몬트리얼 콩쿠르 파이널 실황)

2부는 쇼팽의 즉흥곡 1번 A♭장조, 타란텔라 A♭장조로 시작했다. 쇼팽의 음악 중 밝고 상쾌한 편에 속하지만, 쇼팽 콩쿠르에서 김수연이 이 곡들을 연주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쓰라져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콩쿠르 3라운드를 지켜본 피아니스트 원재연은 국내 일간지에 담담하게 전했다. “김수연의 연주는 폴란드 사람들도 놀라워하는 서정미 높은 수준이었다. 쇼팽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소리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현지 평론가, 바르샤바 음악원 교수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원재연 <쇼팽 콩쿠르 라이브>, 중앙일보 2021. 10. 17) 

그가 파이널에 오르지 못한 원인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지난번 우승자 조성진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캐나다의 브루스 리우, 러시아의 니콜라이 코자이노프, 한국의 김수연, 이렇게 세 명이 우승을 겨룰 거라고 보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허망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콩쿠르 참가자의 실력은 종이 한장 차이고, 당일 컨디션이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한 심사위원이 높이 평가한 연주자를 다른 심사위원이 낮게 평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지나간 얘기를 되새기는 건 헛된 일이니 그만 두는 게 낫겠다. 

김수연 자신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10월 19일 페이스북 글에서 그는 “결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며 “후회 없이 다시 도전했고, 제 음악에 의심 없는 무대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함과 긍지를 느낀다”고 밝혔다. 놀랍도록 의연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말대로 “인생에서 참으로 값진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이다. 그는 “앞으로도 늘 진정성과 책임감을 가진 연주로 찾아뵙겠다”고 했고, 이 날 연주는 약속이 진심이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어진 쇼팽 환상곡 F단조는 가장 짙은 감동을 전해 주었다. 첫 부분 낮은 유니슨의 행진곡은 뒤따르는 프레이즈와 대화하며 무궁무진하게 변화했다. 마지막 코다 대목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부의 마지막은 폴로네즈 F#단조 Op.44로 장식했다. 열정적이고 비장한 춤곡 리듬이 가슴에 사무쳤다. 앵콜은 즉흥환상곡과 화려한 왈츠 F장조, 스케르초 3번과 소나타 3번의 3악장 ‘라르고’ 등 점점 더 깊이 있는 곡으로 이어졌다. 특히 마지막 ‘라르고’는 쇼팽에 대한 김수연의 사랑과 열정이 가득 담긴 씻김굿이었다. 콩쿠르의 아픈 기억은 저 멀리 흘러가고, 이제 쇼팽에 대한 사랑만 오롯이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쇼팽 환상곡 F단조, 소나타 3번 3악장 (쇼팽 콩쿠르 3라운드 실황)

김수연이 언제나 잘 다듬어진,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은 유튜브를 검색해 보면 아실 수 있다.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라벨 등 그의 연주를 조금만 들어도 성실한 연습과 학구적인 자세가 뒷받침된 탄탄한 연주자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단 하나, 조금만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즐기면서 연주하는 경지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다. 음악가들을 서열 짓는 콩쿠르의 중압감에서 해방됐기 때문일까? 이 날 연주회에서 김수연은 바로 그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다. 그는 콩쿠르의 긴 동굴을 헤쳐 나오면서 더 훌륭한 음악가가 돼 있었다. 

김수연의 장래는 밝다. 젊은 그를 생각하니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가 떠오른다. 시인 김선우는 ‘늙은 피레스’의 얼굴이 좋아 가끔 실황 DVD를 찾는다고 한다. 피레스는 공연장에서 생태환경 관련 유인물을 나눠주고, 학대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고, 대중음악 뮤지션의 피아노 반주를 해주기도 한다. 그는 피아노 캠프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줄 빵을 피아니스트의 귀한 손으로 직접 반죽해서 만든다. 시인은 말한다. “밭에서 풀을 뽑다가 쓱쓱 손을 닦고 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는 피르스의 모습, 음악과 삶이 단절되어 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피레스의 숨 쉬는 피아노가 좋다.” 

김수연의 화양연화는 이제 시작이다. “콩쿨은 끝”이라 했으니 그의 경쟁 상대는 그 자신 뿐이다. 그는 피아노 독주자 뿐 아니라 실내악, 피아노듀오, 협연자로 다양하게 음악을 나누는 음악가다. 그가 삶을 사랑하고, 음악을 자유롭게 즐기며, 많은 사람들과 기꺼이 음악 사랑을 나누기 바란다. 그는 소탈하고 정직한 품성으로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마리아 주앙 피레스를 닮았다. 나는 김수연이 피레스 못지않게 멋진 음악 인생을 살아갈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