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나를 지탱해주는 힘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나를 지탱해주는 힘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1.12.0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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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나라 근대사를 절반 이상은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는가 싶다. 내가 국민학교, (요즈음은 초등학교라고 하는) 3학년 올라가서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어느 날 갑자기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서 들리는 대포소리에 놀라 교실에 앉아 불안에 떨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더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황겁히 교실문을 나가셨다. 영문도모르는 채 우리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길 위는 어수선한 채 사람들의 발길은 분주했다. 6.25 사변이 난 날이었다. 중앙청에서 가까운 조계사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우리 집은 시내 중심가여서였는지 우왕좌왕 허둥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나는 무슨 큰일이 났다는 걸 예감만 했을 뿐, 도시 알 수 없는 채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우리 형제들이 집 밖을 나가지 말도록 명령을 하셨다. 곧 라디오를 통해 들리는 방송으로 우리는 전쟁이 났음을 알았다. 이북이 갑자기 쳐들어 와 정부나 개인이 혼비백산한 채 온 세상은 불안과 혼동의 소용돌이 속을 맴돌며 출구를 못 찾는 혼란과 혼동,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이 얼마 되기 전에 꽤나 잘살았던 우리 집에서 일본 순경들이 들이닥쳐 우리 집 부엌에서 몇 차례 유기그릇을 실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와 어머니, 큰어머니의 안색을 보며 나라가 없는 식민지 국민의 삶이 얼마나 무능, 무참한 것인지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폴란드의 퀴리 부인처럼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우리나라의 실정을 국외에 알려 이 나라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과학자로 세계에 나가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당찬 나의 생각은 6.25를 겪으며, 1.4 후퇴 때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다시 전라도 광주여중 반년, 광주여고 일년, 피난 끝에 다시 모교로 돌아와 옛 교우들과 선생님들을 만나며 우리의 유· 청년시절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모교에 돌아와 보니 우리 반에는 서울에 남아 모교의 품에서 피난생활을 지탱한 한 부류와 부산 보수산 산언덕에서 언덕을 깎아 의자로 삼고, 소나무에 칠판을 걸고 공부하던 한 무리와, 나처럼 부모님을 따라 지방 곳곳 남쪽으로 흩어져 학교를 다녔던 세 부류의 학생들이 모여 오랜만에 함께 공부를 하게 된다.

다행이 우리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큰 스승으로, 그들은 인품으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우리 나리의 각 분야의 태두가 되시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얼마 안 돼 우리나라 각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학문의 태두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부모님 덕을 크게 입었지만, 뒤이어 스승님과 학우들을 잘 만난 행운아임을 지금도 자랑한다. 그러한 복을 누린 만큼 내가 갚아야 할 은혜가 큼을 가슴에 잊지 않고 지니고 살았다.

화물차 짐칸에 겨우 실려 부랴부랴 남쪽 부산으로 피난한 과정과 광주에서의 생활을 겪으며 퀴리 부인이 되어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꿈은 구름 조각이 되어 날아갔다. 대학의 무슨 과를 택해야 그래도 한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나날이 커졌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나라의 보탬이 되는 인재가 될까? 하는 고심으로 아버지와 집에서 멀지 않은 삼청공원을 돌며 일주일을 대화를 나누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나 아버지가 하라는 거 그냥 그거 할건데 ~~" 그런데 아버님 말씀이 여간 인색한 게 아니었다. "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거니 네가 정해야 나도, 너도 편한 것이다. 단 전쟁을 겪고 보니 여자도 자기인생을 지고갈만한 자격증이 있는 공부를 하는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인것 같구나!" 

당시 여자가 할만한 자격증 있는 직업은 약사와 의사밖에는 없는 걸로 보였다. 바지 입기를 좋아한 나는 당시 교사는 바지를 못 입는다 하고, 남의 인생을 인도하고 인품을 책임지기에는 자유분방한 나는 아예 교직에 대한 관심은 접은 상태였다. 약사는 흰 가운을 입고 거리를 내다보는 직업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의사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아버지가 수술하시는 날 수술견학을 하러 들어간다. 나는 피를 보는 직업은 내가 해낼 직업이 아님을 직감한다. 그래도 속단을 하지 않기 위해 두 번째로 수술견학을 하고는 마음을 접는다.

그러고 보니 당시 여자로서 자기와 사회를 질어지고 갈 만한 직업과 직종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외국어를 여러 개 배워 여행을 많이 한 뒤 외교관을 해보면 어떨까 했다. 아버지 절친의 아들로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이 된 오빠에게 내 의견을 털어놓고 의논을 했다. ‘외교관이란 직업은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명령을 수행할 뿐, 대사나 되어야 좀 운신할 여유가 있는 직업인데 네가 만족할는지, 더구나 여자를 대사로 시켜주기나 하겠냐’는 것이었다. 건축과를 가서 멋진 설계로 집을 지어 건설에 동참하려 해도 여자가 설계한 집을 지으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여자 대사가 나오기는 요원한 시대에 사는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였다. 결국 부잣집에 시집가서 여행을 많이 하고 집에 많은 사람을 초대하여 파티나 열고 사람 구경을 하며 좋은 글이나 쓰다 가면, 어차피 퀴리부인이 되어 나라도 못 구하는 마당에 반구실은 하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여러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지원하여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4년을 배운 독일어로 식당 가서 식사주문도 못 할만한 어학실력을 감지하고는 유학을 생각해본다. 이렇게 나의 청춘은 탐구와 고뇌, 꿈과 좌절, 아니 아예 꿈도 못 꾸어본 채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으로 나라에 보탬이 되며 한 사람으로 구실을 하다 갈 수 있는지 암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독일 정부가 1년에 한 번씩 서너 명의 장학생을 뽑아간다는 소식에 드디어 나의 출구를 발견했다. 여행도 하고 견문을 좀 넓히고 오면 작은 힘으로라도 나라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꿈을 가지고 응시하여 독일 유학의 문을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