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나를 지탱해주는 힘 II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나를 지탱해주는 힘 II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1.12.2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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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1961년 8월 26일, 나는 독일을 향하여 여의도광장에서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돌다리도 두드려봐야 하는 의사 출신 아버지의 반대는 드디어 '사람은 해보고도 후회하고 안 해보고도 후회한다고 하니 딱 1년만 있다 오너라' 하고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 한국, 아니 서울에는 공항이 없었다. 여의도 광장에서 그것도 전세비행기를 타고 6일 만에 드디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였다. 당시로는 유럽에 가는 승객이 충분치 않아 일본 동경에서 타고 온 손님 예닐곱 명, 서울에서 대여섯 명, 홍콩에서 대여섯 명, 마닐라에서 서너 명, 다시 칼 캇타에서 주유 마치고 중동 바레인을 거처 아름다운 비엔나에서 몇 분 손님 싣고 주유하고 드디어 마인강이 흐르는 울창한 전나무숲 위를 거치며 내린 공항은 우람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답고 고즈넉하였다.

당시 비행기가 거의 매일 주유를 하며 손님을 날라야 하는 조건으로 인해 나는 뜻밖에도 엿새 동안에 이름 있는 서방세계로의 하늘을 통해 나의 세계여행은 덤으로 주어진 듯했다. 비록 도시의 속살은 경험하지 못했을 망정 각 지역의 다른 공기와 분위기는 수박 겉핥기의 맛을 본 셈이다. 세계는 비록 공항에서 머물며, 또는 비행사가 베푸는 대 여섯 시간의 '싸잇트 씨잉'을 통해 여러 도시의 공기를 마셔보며 제 호기심의 실낱같은 부분을 채우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먼저 유학 오신 두 선배님들의 환영을 받으며 하루 이틀을 묵으며 긴 여행 끝에 발이 부어 구두가 안 들어가 우선 구두부터 사신고, 바로 어학코스를 밟았다. 독일의 중세도시,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러나 한적하기까지 한 Rothenburg ob. der Tauber 란 유서 깊은 마을 같은 목가 도시에서 2개월을 독일어를 배웠다. 세계 각 나라에서 나처럼 DAAD 장학생으로 유학 온 각 나라의 유학생들과 지내며, 즐거우나 <인종 동물원>'의 진기한 풍광을 겪으며 11월 초에 시작하게 되는 겨울 학기에 맞추기 위해 독일 남쪽에 있는 Tübingen으로 향했다.

우선 <외국인 학생 사무소 Auslandsamt >에 들러 신고를 하고 기숙사 배정을 받고, 건강보험에 들고 강의등록은 며칠 후 강의 내용을 훑어보고 내가 듣고 싶은 강의와 학점 신청을 하면 되었다. 그 자유로움과 운신의 폭이 서울대 문리과대학과 유사하여 큰 걱정이 없을 듯하였다. 베를린 대학을 추천받았지만 나는 서울이란 대도시가 <나>를 찾아 세우며 공부하기에 너무 빼앗기는 시간과 사건이 많을 듯하여 남부 독일 전원도시이며 철학과 종교, 그리고 미술사학, 종교미술, 독일의 시성 횔더린이 생을 마친 독문학으로도 명성이 높은 튀빙겐을 택했던 것이다. 단 1년이란 주어진 나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가장 <나> 다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언제 가장 행복하고 나 다운 모습을 만나게 되는지가 나의 제일 큰 숙제였다.

그래서 잘 되지도 않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교류할 때 나는 언제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언제 내가 가장 틀어지거나 찌그러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을 지니는지, 진솔한 자기관찰을 통해 나의 숨겨졌던 나와 만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남과 만나 질 때 사람들 속에서 내가 가장 편안했을 뿐 아니라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편안하다는 사실도 함께 터득했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아침잠이 많아 늘 '게으르다'는 컴플렉스로 <나>를 괴롭히던 나를 극복하였다. 이것은 큰 수확이었다. 또한 사람들의 유형에는 종달새처럼 아침형 인간과 저녁시간에

생기가 나는 올빼미형이 있어 자기형의 리듬을 찾아 자신의 최적의 시간 활용을 통해 자기완성을 지향하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로써 <게으르다>는 콤플렉스는 극복한 셈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나를 돌아보는 나는 아주 편안한 존재가 되었다. 자기 존재의 변별성을 통해 자기를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된 <나>는 내가 남과 교류할 때도 내가 훨씬 안정감이 있고 그. 안정감으로 인해 <자연스러움>을 자아냈고 그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쌍방이 모두 편안한 관계가 됨을 터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성스러움과 예민함', '신비하리만큼 심오하면서도 단호한' Rainer Maria Rilke(1875 ~ 1926)의 시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원인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나는 여전히 릴케의 시와 생애, 편지와 그 시대는 나에게 많은 매력과 불가사의함을 주었고, 그럴수록 나는 그의 생애와 시대, 특히 Luo Andreas Salome와의 러시아 여행, 아울러 Nietzsche와 Wagner음악과의 관계, 당시 비엔나와 뮌헨에, 그리고 파리와 얽혀있는 유럽 지성들의 고민과 혼돈, 세계 제1차 대전이 터지기 전의 전운의 소용돌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사회 및 시대변화를 겪으며 고민하던 유럽의 지성사가 이 위대한 몇몇 작가와 사상가들 속에 얽혀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채, Rilke 에 대한 매력으로 인해 내가 물귀신에 홀려서는 안 되겠다는 막연한 경계를 하고 있을 때 나에게는 매우 유럽의 또 하나의 지성

Hugo von Hoffmansthal(1876 ~1929)의 문학과 Richart Stauss(1864~1949)의 음악을 접하며 많은 위로와 중심을 잡게 된다. 특히 호프만스탈의 유럽적이며 유럽 지성의 단단한 지렛대는 릴케의 연약하면서도 여성적이며 신비함마저 매력으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시성의 모호함과 대비가 되면서 나에게 삶의 큰 지혜를 일깨워주었다.

호프만스탈의 <존재관>은 하마터면 릴케의 모호한 표현과 보이지 않는 더 큰 세상을 지향하다 뿌리를 놓칠 수도 있었던 나의 이해력에 큰 버팀목을 마련해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선험의 생애 Pre Existenz>를 살다 삶을 마치는데 비해 <진정한 존재 Existenz>를 터득하고 생을 마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존재 Existenz를 터득하는 길은 오로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의 완성>을 맛 본 사람, 그리고 그 <너와 나>의 관계를 완성의 경지로 이끌어 완성할 때 느끼는 삶의 완성을 깨달은 인간만이 온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는 철학 속의 완성된 문학이었다.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Pre Existenz 선험적 인생과 Existenz 진정한 인생,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터득한 '진정한 자기의 삶'을 살다가라는 명제는 릴케의 모호하게까지 느껴지는 시성의 세계에서 나를 구출해준 구세주가 되었으며 이울러 호프만스탈의 리브렛토로 한층 완성도를 높인 R. Strauss (1864~1949)의 음악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참으로 고마운 또 하나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덕분에 나는 Wagner의 음악세계도, Nietzsche가 외친 진정한 그 시대의 고민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현대음악의 불협화음의 근본, 윤이상의 음악에 왜 서양음악인들이 그렇게 매료되는지 음악인이 아니면서도 비슷하게 그 근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 몸으로 터득한 나의 초기 유학생활은 아직도 나를 지탱해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때때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