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잃어버린 낙원(Lost Paradise)’을 찾아서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잃어버린 낙원(Lost Paradise)’을 찾아서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1.12.2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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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금 학고재갤러리에서 조성희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최근 10년간 조성희는 국내외 활동을 통해 주목할 만한 전시를 수차례에 걸쳐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작업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조성희는 작품에 필요한 여러 가지 부속품들을 만든다. 한지를 다양한 크기의 원으로 오려서 만든 꽃잎과 사각형으로 잘라 일일이 말아서 만드는 꽃대 등등이다. 그녀는 한지를 바른 캔버스 위에 일일이 대여섯 개의 꽃대를 모아서 붙이고 그 위에 꽃잎을 얹어 풀로 고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채색의 과정에 들어가는데, 테레핀으로 묽게 푼 유성물감을 듬뿍 묻힌 커다란 붓으로 뿌려 색을 입힌다. 여기서 그녀가 테레핀을 쓰는 이유는 송진 성분이 있는 테레핀이 천연의 재료여서 물감이 한지에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을 십수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한다.

미지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조성희의 지칠 줄 모르는 반복적 행위는 작품 속에 그대로 유입돼 특유의 아우라(aura)를 만들어낸다. 붉은색의 단색화가 됐든, 마치 꽃밭 속의 꽃들처럼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다색화가 됐든, 조성희가 만든 작품들은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유비(analogy)인 바,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줌으로써 치유의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나는 그녀의 이전 개인전 도록에 수록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조성희의 작품은 인생의 축도이자 지나온 삶과 세월의 응축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나 연못 위에 가득 찬 연잎, 혹은 초원 위를 뒤덮은 클로버처럼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무수한 작은 원형의 한지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작가의 상념을 담고 있는 듯 하다. 그것들이 하나의 집합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읽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지닌 독특한 존재 양식은 작가와 관객 간의 소통을 위한 매개물이다.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작가와 기나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런 엄청난 열정을 불러일으켰는가? 우리는 작가의 지난한 삶의 분비물인 작품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섬세한 내면과 작업을 향한 불굴의 의지, 무쇠도 녹일 듯한 예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감지할 수 있다.”

-윤진섭, 우주와 인생에 대한 통찰, 조성희의 한지작업에 대하여-

그렇다면 조성희가 광기에 가득 찬 창조적 열정으로 뿜어내 놓은 저 상상의 꽃밭들, 즉 아름다운 오브제 작품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 시대에 어떤 미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 그것은 실제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허구로써 실제를 대리하는 감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조성희의 이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관객들에게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 즉 ‘잃어버린 낙원’으로 향하는 다리가 돼 줌으로써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치유를 효과를 낳는다. 특히 강렬한 붉은색과 푸른색 등등 단색화의 작품은 강한 에너지의 발산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자에게 열정을 불어넣게 될 것이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조성희의 한지작품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단색으로 보이는 특수한 국면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반복성과 수행성, 촉각성을 특징으로 하는 ‘단색화(Dansaekhwa)’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조성희의 단색화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노동집약적인 수공(手工)에 의해 제작되는 조성희의 한지 작품은 반복되는 수작업(手作業) 특유의 아우라를 지닌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혹은 극기(克己)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류(類)의 작업은 시간의 축적 혹은 과정으로서의 예술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수행(Suhaeng:performance)’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 국제적으로 부상되고 있는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는 유교, 도교, 불교가 어울려 혼효(混淆)되는 가운데 형성된 한국 특유의 문화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조성희의 한지 작업에 대한 이해와 평가도 이제는 이러한 문화적 준거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윤진섭, 우주와 인생에 대한 통찰, 조성희의 한지작업에 대하여-

조성희의 한지를 이용한 작품들은 예술가의 특권인 상상의 산물이다. 창호지를 바른 격자창과 완자창으로 둘러싸인 한옥에 얽힌 유년기의 추억은 조성희 예술의 원천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가 지금 벌이고 있는 저 창조의 에너지로 가득 찬 작업은 어렸을 적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놀던 유희 본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출신의 탁월한 역사가인 후이징아(Johan Huizinga)가 문화의 본질로 본 ‘놀이 정신’이 조성희의 작업 맨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고된 작업을 장구한 세월에 걸쳐 지속하지 못 했을 것이다. 놀이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늘 새로운 작업을 향한 창조의 더듬이를 통해 작업의 반경을 넓혀나가는 조성희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기 위한 끊임없는 놀이의 천착이 아니겠는가? 70대 노령에도 불구하고 불처럼 뜨거운 정열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조성희는 단색화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의 구축을 위해 오늘도 정신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