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의 인문학 파먹기]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는 일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의 인문학 파먹기]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는 일
  • 윤이현
  • 승인 2022.01.0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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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에 썼던 글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은 유서였다. 연필을 꼭 쥘 힘조차 없던 꼬마는 뭐가 그리 힘들었는지 매일 유서를 썼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이 괴로웠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때 언니에게 꾸중을 들었던 것이 서러웠다. 생일 전날 초대장을 나눠 줄 때나, 아무 일도 아닌데도 반 아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을 때, 기대고 의지했던 친구가 나를 배신했을 때 죽고 싶었다. 그 마음조차 표출할 곳이 마땅치 않자, 종이에 적어 방 구석구석에 붙여두기 시작했다. 훗날 정말로 죽게 된다면 모두가 그 슬픔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방 사이사이에 스며든 죽음의 기록 틈에 누워서 온갖 고민과 희망을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열아홉에 처음 제대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땐 1,000자 원고지를 채우기가 참 벅찼다. 제목을 정하고, 나열된 생각을 정리해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니. 게다가 꼬박 다섯 시간에 걸쳐 써간 너덜너덜한 원고지 위엔 빨간 글씨로 날카롭게 휘갈긴 선생님 표 첨삭이 적히곤 했다. 고쳐 쓰는 건 비교적 쉬운 작업이었으나 한편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나를 있는 힘껏 열어 보여줬지만, 누군가에겐 그 마음보다도 글의 오류가 먼저 눈에 띄었을 걸 상상하니 글을 쓰는 일이 즐겁지가 않았다. 지적받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그 당시의 나의 유일한 관심사였을 뿐이었다.

대략 30권의 책을 읽고, 200편의 글을 썼을 때 즈음 성인이 되었다.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아 넘어가기로 한다) 그로부터 꼬박 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매일 한 편의 글을 쓴다. 일기를 쓰고,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A4 용지에 손편지를 적어 보내기도 하며, 일주일에 한 번 감사하게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나의 태도도 변화했다.

열아홉에 배웠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계획 없이 글을 쓴다. 입시도 관뒀으니 과거에 비해 부담이 없는 셈이다. 제목도 내용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저 최근에 생긴 몇 가지 크고 작은 경험을 떠올려보고 그것들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연관성을 찾아내고 이어붙인다. 예를 들어 밖에서 검은 고양이를 보고 우리 집 반려묘 깨미인 줄 알고 허겁지겁 쫓아갔던 일, 그리운 이에게 술기운을 빌어 보냈던 문자, 새벽마다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던 일. 이 일련의 사소한 사건들은 서로 아무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에 의해 모이고 다듬어진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극적 요소가 들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녹아 문장 사이에 스며드는 것이다. 마침표를 찍고서야 한시름을 놓는다. 그리고 잠시 모니터 앞에서 눈을 감는다. 글을 완성했다는 안도와 함께 밀려오는 감정의 구역질이 한동안 나를 지배한다. 동시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던 때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어두운 모니터 화면 너머엔, 자꾸만 죽고 싶어져서 아파했던 그 시절처럼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는 가 있다.

올해는 우연과 운명의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을 만나 사랑했고 이별을 했다. 후회와 미련 속에 내내 아파하다 각자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한편 한동안 진전이 없던 우리 가족의 관계는 작은 언니를 구심점으로 뭉쳐졌다. 여전히 어색하지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로부터 용기를 얻어 연말을 빌미로 오래전 끊어진 인연들에 문자를 보냈다. 친구와는 손가락에 우정의 징표로 타투를 새겼고, 코에는 작고 빛나는 피어싱이 자리 잡았다. 어떠한 연관성도 없을 것 같던 사건들……. 그러나 내 방 곳곳에 쑤셔 넣어둔 연서와 원고지 속엔 지난 1년의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삶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을 설령 누가 읽어주지 않더라도 계속 글을 쓰는 행위만큼은 계속될 것 같다. 글은 단순히 창작의 욕구를 넘어 나를 살리는 힘이고, 말주변 없는 내가 유일하게 상대에게 진심을 꺼내어 보여주는 방법이다. 또한 와 마주하게 하고, 자신도 몰랐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이번 연말, 서점에서 습관처럼 스케줄러를 골라 담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바구니에 작은 일기장도 한 권 담으려고 한다. 매분 매초 살아 있는 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감히 예상해보건대, 아마 그 관련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느낌이 오는 순간엔 과감하게 가위를 들어 이 모든 사건을 재단하고 꿰매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외로 강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고, 무의식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트 한 권을 온통 자신의 이야기로 채웠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까. 괴테의 말처럼 그 결과와 답은 신만 알고 있다. 글 속에서만큼은 당신이 곧 신이고 신이 곧 당신이다. 이제 다시 펜을 들고 노트를 펴고자 한다. 그리고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읽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자. 나에게서 내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