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김보나 ‘시’ 당선자…“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김보나 ‘시’ 당선자…“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01.1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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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 돋보여”
▲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 김보나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낸 김보나의 ’상자 놀이’가 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당선의 영광을 안은 김보나(32·서울) 씨의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서정시로, 심사위원들 사이에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은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라는 심사평을 전했다. 

이어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라고 덧붙였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김보나 씨는 “겨울의 초입,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가능성은 높지만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막막한 그때, 당선 전화를 받았다. 거짓말처럼 생일에 걸려 온 전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이제 활자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라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가족, 친구,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그는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숨은 씨앗을 어떻게든 찾아내 싹을 틔우는, 햇빛을 닮은 힘이 이 글에 어리면 좋겠다. 앞으로도 활자를 믿고 쓰면서, 어쩌면 날 녹일지도 모를 빛과 사랑을 따라 흔들리며 나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상자 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