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魂)을 부르는, 혼(魂)을 달래는 소리꾼 장사익
혼(魂)을 부르는, 혼(魂)을 달래는 소리꾼 장사익
  • 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10.01.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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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노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난해 12월, 명창 안숙선과 장사익 선생이 함께 ‘안숙선&장사익 송년특별콘서트’를 펼쳤다. 2008년 처음 열려 화제를 모았던 이 합동 콘서트는 지난달에도 어김없이 순식간에 전석이 매진되었다. 2009년 인터파크 티켓파워의 클래식과 무용, 전통예술 부문에서 소리꾼 장사익이 최강자로 뽑힌 사실도 그의 인기를 실감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소리꾼 장사익을 접해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은 장사익의 노래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그의 노래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어떠한 경로로 접하게 되었는지는 상관없다. 한국인이던 외국인이던 상관없다. 그의 노래를 단 한 번이라도 듣게 되면 열광적인 팬이 되어버린다. 혼이 담긴 목소리로 사람들의 혼을 달래기도, 혼을 빼놓기도 하는 이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노래 인생을 들어봤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북한산 끝자락의 홍지동 산동네. 그곳을 오르면 성벽이 붙은 암벽 밑에 2층집이 보인다. 장사익 선생이 직접 파이프 두 개로 뚝딱 만들어 냈다는 새 모양의 솟대에 걸려있는 풍경은 바람에 맞아 은은한 소리를 냈다.

아름다운 모습에 심취한 채 들어간 그의 집에서 또 다른 황홀경을 맛볼 수 있었다. 넓은 창문으로 보이는 멋진 풍경이 웅장함을 드러냈고, 목재구조로 이루어진 집 안의 아늑함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집 한 쪽 벽에는 ‘백년가약서’가 붙어있었다. 자신의 부인을 하늘로 표현하고, 자신은 땅으로 표현하며 100년 동안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믿으며 살자고 서약한 내용이다.

“좋은 인연은 어떻게든 만난다. 좀 늦게 만났을 뿐이다.”는 그의 말 속에 부인에 대한 사랑이 한껏 묻어나왔다.

장사익 선생이 음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 그의 나이 31살 때라고 한다. 국악인으로 출발해 태평소 연주를 하고, 대금을 불었다. 그러나 생활이 힘들어 여러 가지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0여 년 동안 보험회사, 제지회사, 가구회사, 노점상, 독서실, 카센터 등 열 대 여섯 군데의 직장을 떠돌며 “별 볼일 없이 살아 별 볼일이 없었다.”

그러다 46세가 되던 해인 1995년 8월, 가수로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에 1집 ‘하늘가는 길’을 발매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한다. 삶의 막연한 동경이었던 음악에 대한 꿈. 그 꿈을 이루게 된 날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배우고, 혼자 취미생활로도 하면서 나름대로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치 어린애가 태속에서 나올 때 탯줄을 잡고 나오듯이 내 생의 탯줄을 붙잡고 나온 것 같았어요.”

주변에선 그의 노래에 삶의 깊이가 있다고 말한다. 창법과 음색에서 지나온 삶의 통한이 절절이 묻어난다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스스로도 ‘사회생활 25년을 하면서 넘어지고 얻어터진’ 경험을 날것 그대로 한 곡 한 곡 노래에 담아 불렀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나이 들어서 부르는 노래가 진정한 노래라고 말해주는 게 제일 좋은 칭찬이라 생각해요. 마음 속 깊이 묻혀있는 슬픔과 애환을 소통하는 비수 같은 노래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있어 노래는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이기도 하다.

“가수가 되고 나서 3, 4년 지났을 때 무렵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지요. 인생의 길을 찾는 모습은 보고 가셔서 그나마 효도한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게 부모님께 효도이지 않나 생각해요. 예전에 다른 직업들을 가졌을 때는 내색 안하셨지만, 노래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을 놓고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예전에 농악치실 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듯이 아버지도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저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여백에 마음을 담는 동양화와 같은 평정심과 된장처럼 자연스레 가면서 고추장처럼 톡 쏘는 긴장감이 잘 버무려진 그의 음악들. 거기에 “죽을 힘을 다해 부르면 죽을힘을 다해 들어주신다.”며 진정성을 다해 참으로 정성껏 노래를 부르는 그의 참된 매력. 이러한 것이 바로 그의 음악이고, 청중에 어필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아닌가 싶다.

고정관념 깨면 노래는 더 아름다워져

얽매이는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해 자유로운 삶의 길을 걸어왔다는 장사익 선생은 자신의 노래에 굳이 장르를 둘 필요가 없다고 한다.

“노래가 안 되면 탁자를 치면서 나레이션을 통해 연극적인 느낌도 줄 수 있는 것이고, 읊조리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노래를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것을 차용하다보니 사람들은 새롭다고 하지만, 다 국악, 오페라에서 나오는 형식일 뿐입니다. 대중음악은 가요, 곡으로 존재한다는 고정관념만 깨면 다양하고 재미있어질 수 있어요.”

노랫말이 다양해지면 더 아름다운 음악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노랫말들은 심금을 울리는 시와 자전적 글로 메워져있다. 자신의 음악 중 90% 이상을 좋은 시를 찾는 데 사용한다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엄선된 감동과 생명력을 전달해주는 그의 노래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당연한일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풍습중인 고려장의 내용을 담고 있는 ‘꽃구경’ 을 새삼 만들게 된 것은, 시를 보고 왠지 나한테 하는 얘기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제 나이 정도 되면 3,4대가 정답게 같이 살면서 따뜻한 손길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핵가족화로 그런 게 많이 사라져버렸죠. 지금은 아버지가 나이를 먹어 노쇠해지면 요양원으로 보내 버리자나요? 꼭 던져버리는 것 같아요. 현대판 고려장이죠.

마찬가지로 ‘바보천사’라는 노래를 부른 것도 우리 엄마들의 얘기, 엄마가 자식을 키워주는 모습의 얘기들이 나에게 하는 것 같았고 부모님을 찾아뵈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노래에 울고 감동하고 뭔가를 느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얘기니까 가능한 겁니다.”

언제나 주옥같은 노래들로 우리의 마음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그. 지금과 같은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승님은 어떤 분일까 궁금하다.

“모든 분들이 다 선생님입니다. 이 세상엔 선생님이 아닌 사람이 없죠.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나름의 배움을 주죠. 자연도 그렇고. 음악인 김대환 선생에게는 자유를 배웠죠. 호흡대로, 박자 맞추는데 신경 쓰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 그의 공연은 이제 티켓을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 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아쉬움을 실황음반을 통해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5월 1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공연 실황이 두 장의 CD에 담겨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따로 녹음한 음반이 아닌 실황음반을 낸 것에 대해 “익어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듯 자연스레 엮어서 툭툭 녹음을 한다.”는 장사익 선생.

외국에서도 극찬한 한국의 울림

작년 6월, 그는 ‘사람이 그리워서’ 를 가지고 뉴욕, 시카고, 워싱턴, LA의 미국 4대 도시를 돌고 왔다. 장사익 선생님이 무대에서 토해낸 한국의 정서는 미국 전역에 감동과 환희의 물결을 수놓았다.

하지만 처음 발을 디뎠을 당시엔 현지 관계자들이 광대 집단 정도로 생각하며 많은 무시를 했다고 한다. 한 예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려야 겨우 장비를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공연에 관객들이 순식간에 가득 들어차고, 시간이 오버될 정도로 성황리에 마쳐지자 극장 관계자들이 전율을 느꼈다고까지 하면서 극진한 대우를 했다고.

LA에서 가장 큰 규모의 챈들러 뮤직홀에서의 마지막 공연 때는 공연 두 시간 전부터 교민들과 현지인, 할리우드 공연 관계자, 취재진 등의 열기로 가득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공연은 여러 곳에서 호평과 찬사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피를 토하듯 톡 쏘는 음색이 감동적이었다.”고 보도했으며 메릴랜드의 아시아 아트&컬처센터, 뉴욕시티센터 등에서 초청공연 요청도 들어왔다. 공연을 본 일본 공연기획자는 즉석에서 일본투어 공연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는 공연 후 끝없이 앵콜을 외치던 많은 동포들을 회상했다.

“미국 사회에서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 사람들이 30년, 40년 살며 쌓이고 쌓인 것들이 돈을 준다고 허물어지진 않죠. 그런데 저의 별 볼일 없는 노래하나로 교포 분들의 스트레스가 풀렸다고 하니 매우 기뻤습니다. 특히, 모국에 대한 정서와 애정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들의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감개무량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김삿갓

장사익 선생은 ‘김삿갓’을 꼭 빼닮았다. 언제나 ‘노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픈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가는 데로 행하는 것이 매력이 있다. 무대 위의 모습은 자신이 봐도 “뭔가 있는 대단한 녀석이야” 라고 감탄할 정도지만 무대 위에서 내려오면 평범한 자연인일 뿐이라고 수줍어하며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심지어 그는 분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로 무대에 올라간다. 이는 같이 늙어가는 것을 공유하자는 뜻에서라고 한다. “얼마나 재미있어요. 실수하면 실수하는 그대로, 못하면 못 하는데로. 사람이 어찌 완벽하게 다 하나요.”

소탈하고 자유롭게 살아서인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거의 없다는 장사익 선생. 이런 그가 1월 30일 팬클럽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1년에 한두 번 수련원에서 모임을 가져요. 팬덤이라기 보다 가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컴퓨터로 시공간 개념 없이 만나면서 힘을 얻기도 하면서 바로 가족의 힘을 느껴요. 처음에는 도망도 다녔는데, 지금은 계속 교류를 하면서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작은 일에도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오늘날 젊은이에게선 볼 수 없는 희망과 즐거움이 가득 찬 장사익 선생. 그는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며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된다는 말을 했다.

“작년에 마라톤도 해봤지만 인생은 정말마라톤입니다. 토끼는 1등만 하려고 하는데, 거북이는 1등이고 뭐고 필요 없이 그냥 세워 둔 목표만 가지고 가지요. 인생도 마찬가지로 목표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1등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1등을 한 것은 아니에요. 언제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됩니다.”

앞으로 더 많은 활동으로 우리들을 매료시킬 소리꾼 장사익. 마지막으로 그에게 후배들에게 해주고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드렸다.

“‘색깔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라’는 거예요. 세상은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색을 갖고 엮어가는 것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그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속도로에서 팔리는 트로트도, 젊은 사람이 듣는 음악도 모두 같이 공존하는 세상. 골고루 각 분야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길을 걸어가면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디서든 주인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는 말도 해주고 싶어요. 고 정주영씨가 쌀집에서 일할 때 ‘이건 내 쌀이야 내 물건이야’ 하는 자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팔려했기 때문에 종업원이었지만 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평생 종업원이 될 것인가는 자신에게 달렸어요. 뭐든지 건성으로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정리 박기훈 기자/사진 김형관 객원 사진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