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서울오페라앙상블 '리골레토', 완성도 높은 음악과 연출, 청중에게 큰 감동 안겨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서울오페라앙상블 '리골레토', 완성도 높은 음악과 연출, 청중에게 큰 감동 안겨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2.05.1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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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오페라 형식으로 베르디 원작을 현대화, 아시아의 항구도시 K에서 거듭나다

페터 셀라스는 <돈조반니>를 뉴욕 우범지역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트럼프 타워로 가져오는 파격으로 오페라 연출의 지평을 넓혔다. 옛 오페라의 배경을 현대로 바꾼 이유를 그는 “음악이 더 잘 들리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셀라스의 연출관이 일리가 있다면, 서울오페라앙상블(예술감독 장수동)의 <리골레토>는 성공이라고 할 만하다. 16세기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일어난 비극을 아시아의 항구도시 K로, 중세 신분사회는 다국적기업이 지배하는 21세기로, 주인공 질다와 리골레토는 이 시대의 디아스포라인 난민으로 설정했다. 그 결과 베르디의 음악은 우리 현실에 맞게 거듭났고, 청중들은 고답적인 오페라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아 숨 쉬는 음악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서울오페라앙상블 ‘리골레토’ 공연 장면 ⓒ서울오페라앙상블
▲콘서트오페라 서울오페라앙상블 ‘리골레토’ 공연 장면 ⓒ서울오페라앙상블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중단됐던 <리골레토>가 5월 13일과 14일 마포아트센터에서 다시 막을 올렸다. ‘콘서트 오페라’라고 했지만, 무대 배경을 프로젝터로 꾸몄고 출연자들의 의상, 분장,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갖춘 오페라였다. 대다수 관객들은 공연에 크게 만족했다. 먼저, 음악의 완성도가 높았다. 13일 캐스팅의 경우 질다 임수연(소프라노), 리골레토 최병혁(바리톤), 두카 김중일(테너)를 비롯한 솔리스트들은 물론 노이오페라코러스 단원들, 우나이 우레초 지휘의 오케스트라 앙상블스테이지까지 고른 기량과 섬세한 앙상블을 선보였다.

오케스트라는 원래 4관 편성을 제작 여건 때문에 24명의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줄여서 아쉬웠다. 하지만, 오히려 득이 된 측면도 있었다. 마포아트센터의 규모에 어울리는 적절한 음량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이 듣기에 편안했다. 1막 ‘그리운 이름’ 시작 부분에서 섬세한 루바토를 구사한 것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좋은 호흡을 이뤘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였다면 이런 섬세한 앙상블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첫날(13일) 리골레토를 맡은 최병혁은 풍성한 음색, 충실한 음량, 열정적인 연기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2막 아리아에서 분노와 연민을 오가는 극적인 감정을 선명히 대비시켰으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었을 것 같다. 긴 음표를 노래할 때 음정이 다소 흔들린 것은 옥의 티였다. 질다 역의 소프라노 임수연과 단연 돋보였다. 그는 맑은 음색, 정확한 음정, 풍부한 표정의 콜로라투라 창법으로 거의 완벽한 질다를 들려주어서 큰 갈채를 받았다. 1막 ‘그리운 이름’의 끝 부분에서 다소 불안한 느낌이 있었지만 최고의 기량과 열정으로 청중들을 만족시켰다.

김중일은 멋진 외모와 맛깔스런 창법으로 바람둥이 두카 역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 잘 알려진 ‘여자의 마음’은 특히 많은 박수를 받았다. 청중으로서 굳이 지적하자면, 소리를 시작할 때 예비음을 내는 것은 음악을 맛깔스럽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지만 남발할 경우 자칫 음악을 지저분하게 만들 우려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령 “에디펜시에르~”를 “우에디펜시에르~”로 내는 식인데, 3막 사중창의 경우 원래 노래 안에 꾸밈음이 있는데도 첫 음에 예비음까지 넣어서 노래하니까 전체적으로 음악이 어수선해진 느낌이었다. 좀 더 깔끔하게, 음표에 충실하게 노래해 주면 더 좋았겠다. 스파라푸칠레와 몬테로네를 맡은 두 베이스는 노래가 많지는 않았지만 탄탄한 기량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렇게 기량이 뛰어난데도 단지 베이스라는 이유로 주역이 아니라니,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번째 날(14일) 공연에서 질다역의 소프라노 최세정의 고음에서도 안정감 있는 맑은 목소리와 섬세한 연기는 돋보였다. 리골레토 역의 최병혁, 두카역의 왕승원도 자신의 배역을 잘 소화해냈다. 단지 리골레토역의 최병혁은 리골레토가 가진 신체적 결함을 끝까지 잘 연기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콘서트오페라, 베르디 '리골레트' 무대인사의 한 장면.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콘서트오페라, 베르디 '리골레트' 무대인사의 한 장면.

연출은 흠잡을 데가 별로 없었다. 무대 배경화면은 거친 항해, 난민 거주지역, 눈 내리는 거리 등의 정감 있는 영상으로 오페라의 분위기를 잘 살려 주었다. 출연자의 액션 타이밍이 잘 안 맞는 장면이 좀 있었다. 2막, 리골레토가 “복수를 하겠다”고 외칠 때 몬테로네가 이 대사를 다 듣고 퇴장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3막, 리골레토가 자루에서 질다의 시신을 꺼내는 동작은 두카의 ‘여자의 마음’을 듣고 나서 해야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스파라푸칠레가 질다를 총으로 쏴 죽일 때는 칼로 찌르는 액션을 해서 부자연스러웠다. 원작대로 칼을 사용하도록 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두카의 의상은 장면마다 바뀌었는데, 1막 1장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구분이 잘 안 됐다. 다른 색상의 캐주얼로 하면 좋았겠다. 3막이 끝날 때 다국적기업의 깃발이 휘날린다고 예고했지만, 새로운 화면이 나오지 않아서 다소 실망했다. 

원작 오페라의 배경을 현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자막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보였다. 1막과 3막, 특히 리골레토와 질다가 나오는 장면에서 현대 상황에 맞게 고친 자막이 많았는데, 이 새로운 자막에 맞도록 원작의 이탈리아어 가사를 고쳐야 할 것 같다.

리골레토와 질다, 스파라푸칠레와 마달레나를 난민으로 설정했다면 이들의 이름이 이탈리아 이름으로 돼 있는 게 어색해 보일 수 있다. 누구나 아는 리골레토와 질다의 이름을 바꾸는 게 곤란하다면, 스파라푸칠레와 마달레나 정도는 우크라이나, 시리아, 예멘 사람의 이름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해외 공연까지 추진할 예정이라면 이런 디테일까지 손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콘서트오페라는 오케스트라가 배우들과 한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오페라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공간의 한계로 출연자들이 지휘자의 옆에서 연기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아슬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출연진 모두 수준높은 기량으로 무대의 한계를 커버하기에 충분했다.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았기에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무대였다. 이번 공연에서 색다른 한 장면으로, 연출자인 장수동 예술감독이 무대인사에서 출연진 모두에게 꽃 한송이를 선물해서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