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Ⅰ
  • 윤진섭(미술평론가)
  • 승인 2022.05.2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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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내가 미술평론가 방근택(1929-1992)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1972년 당시 나는 수원에 있는 수성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당시 수원시의 중심인 팔달문 뒤편에 있던 영동시장에는 개천을 끼고 고서점들이 즐비했다.

미술부 활동을 하는 한편, 일찍부터 문학에 뜻이 있던 나는 서점가를 돌며 관심이 가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사상계를 비롯하여 신동아, 한국단편문학전집, 각종 철학, 역사서 등등 묵은 잡지와 책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독파해 나갔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던 차에, 방근택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현대미술과 엥포르멜 회화>는 1965년에 동양출판사가 펴낸 현대사상강좌 5권에 수록돼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게 방근택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1975년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에 진학한 나는 대학 3학년 때인 1977년에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앙데팡당]전에 <어법>이란 제목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에 대한 방근택의 짤막한 평이 <현대예술>지에 나온 걸 보고 매우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는 당시 이 잡지의 주간이었는데, [앙데팡당], [에꼴드서울], [서울70]을 통틀어 특집으로 다뤘다.

내가 방근택을 직접 만난 것은 같은 해에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회 ST]전(1977. 10. 25-31)에서 였다. 그보다 약 4개월 앞서 열린 [제6회 앙데팡당]전(1977. 6. 25-24)에서 12쪽 패널로 된 퍼포먼스 사진 시리즈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나는 석 달 뒤인 9월 17일 오후 3시에 당시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ST> 그룹의 회장 이건용(1942- )과 함께 <조용한 미소>라는 타이틀로 안국동 사거리 부근에 있는 서울화랑에서 2인 이벤트(Event) 쇼를 벌였다. 이 두 전시를 계기로 나는 이건용의 추천에 의해 ST그룹에 가입을 했는데, 그것은 학생 신분의 내게는 매우 과분한 파격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당시만 해도 명성이 높은 전위미술 단체인 ST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조계사 맞은 편에 있던 견지화랑에서 [제6회 ST] 그룹전이 열렸다. 견지화랑은 1970년에 명동화랑을 열고 초대 화랑협회장을 역임한 고(故) 김문호(1930-1982)가 1977년 재기를 다짐하며 연 화랑이었다. 자수공예가 한상수(여/1935-2016)와 동업이어서 화랑 입구에 자수연구소를 겸한 상점이 있었다. 나는 이 전시의 개막식에서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이란 이벤트를 선보였는데, 관객참여적이며 유목적인 성격의 작품이었다.

전시 중인 어느 날 방근택이 예고 없이 전시장에 들렀다. 나는 카리스마를 강하게 풍기는 인상이 범상치 않게 생각돼 마침 옆에 있는 선배 작가 강창열에게 누군가고 물었다. ‘미술평론가 방근택 선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검정색 정장 차림에 머리가 약간 장발인 방근택은 작품들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마침 전시장 안에는 친분이 있는 회원이 없었던 탓인지 그는 전시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전시에 대한 그의 리뷰는 없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근택과 대면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1990년 이었다. 세월은 견지화랑에서의 첫 만남 이후 무려 13년이 흘러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작가에서 미술평론가로 변해 있었다. 방근택은 1990년 자하문미술관(관장 박신의)의 개관전인 [’90 메시지]전이 열리고 있던 어느 날 전시와는 무관하게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한 강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현대미술에 관한 강연을 하러 미술관에 들렀다. 그날 나는 조덕현, 이길래, 박기원 등등 각종 민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가들을 초청한 이 전시의 도록에 서문을 쓴 관계로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 초대를 받았다. 자하문미술관은 자하문 호텔을 운영하고 있던 조 회장(성명 미상, 건축가/설치미술가 조계형의 부친, 작고)이 같은 건물 지하에 문을 연 것이다. 조회장은 미술관에서 가까운 게요리 전문점 북해도에 방선생과 나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을 했다. 방선생과 조회장 사이에 술이 몇 순배 돌자 둘은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화라니! 대화는 끝이 없었고 내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를 더해갔다.

Ⅱ.

원래 방근택은 영화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1956년 육군 대위로 제대한 그는 “1957년 초여름 부산에서 서울로 이주, 범한 영화사에서 대본 번역과 필름 수입 통관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59년도까지 3년간 이어졌다. 그러니까 조회장과 나눈 영화에 관한 대화는 이때 얻은 체험과 산지식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1949년 부산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 철학을 전공한 방근택이 1950년 9월 육군종합학교 사관후보생 7기로 군에 입대, 광주육군보병학교 통신학 교관(1952-6)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훗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 전시명은 [현대]전)’ 회원들과의 만남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아마 당시만 해도 방근택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955년, ROTC 간부후보생 교육을 위해 입교한 홍익대 미대 출신의 박서보와 이수헌을 만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박서보와의 인연은 군 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애증의 관계가 이 두 사람을 피해 가지는 못한 사실을 70년대와 80년대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호에 계속>


1) 이하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대한 존칭을 생략함. 
2) 내가 하인두의 작품 <태극기송(頌>을 둘러싼 미술평론가 오광수와 하인두의 표절 논쟁을 접한 것도 ‘신동아’(1972년 5, 6, 8월 호)를 통해서 였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복기의 논문 <한국미술의 ‘영향-모방-표절’ 논쟁사>를 참고할 것.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oggi04&logNo=220082845766&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3) 불과 5줄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글에서 방근택은 언어의 문제를 다룬 나의 작품에 대해 비평을 했다. 그의 글은 현학적이며 읽기에 난삽한 것이 특징이다. 방근택의 글은 나의 작품에 대한 첫 비평이었다.  
  “윤진섭(尹晋燮)의 어법(語法)이 의미론적인 시화(詩畵)와 같은 단어의 뜻의 음성학적인 부차적인 희화(戱化)도 아니오, 원소모음(原素母音)의 중응성(重凝性)을 발음(發音)하는 구순(口脣)의 겉모양과 그 문자(文字)의 표시(表示)를 사뭇 대지(大地) 위에다 커다랗게 그리고 있는 것들은-”, 방근택, 현대예술 1977년 7월호 특집/현대미술의 현장-불붙는 냉엄한 투명과 차가운 열기, <앙데팡당>, <에꼴드 서울>, <서울70>을 중심으로- 이 열기에 찬 미술의 7월을 말한다. 37쪽. 
4)  “1991년 3월 자하문미술관의 교양강좌 ‘인상파론’ 특강, 양은희, <방근택 평전>, HEXAGON, 2021 409쪽. 연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