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Ⅲ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Ⅲ
  • 윤진섭(미술평론가)
  • 승인 2022.07.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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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70년대의 비평공간은 방근택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김인환, 오광수, 이일이 1970년대 초반에 ‘AG’와 동지적 끈끈함을 유지하며 선언문 작성을 비롯하여 기관지 <AG>에 글을 기고한 것이라든지, 당시 전위그룹의 선두에 섰던 <ST> 그룹의 이론적 선도자로서 김복영이 갖는 위상에 비교하면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게 한다. 방근택은 화려한 견장이 뜯겨나간 힘없는 장수에 불과했다.12) 자택의 서재에 장기간 칩거하며 애써 번역해 남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수모도 감내해야만 했다. 아마도 매문에서 오는 수치심이 자존심 강한 방근택의 가슴 밑바닥에 치유될 수 없는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을 지도 모른다.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작고하기 이태 전에 내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에서 만사를 초월한 듯한 허허로운 인상을 받았다. 병색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운 얼굴에서 예전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한 평생 학문과 비평을 갈고 닦은 경륜에서 오는 자존심과 결기는 여전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칼칼한 성격도 그러했으리라.

70년대의 비평적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쓴 기왕의 글이 있기에 여기에 전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70년대의 비평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미학 내지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귀국한 이일, 유준상, 임영방, 정병관, 박래경, 유근준 등 유학파 비평가들과 국내에서 미술을 비롯하여 미학,미술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을 전공한 이구열, 오광수, 김인환, 김복영, 김윤수, 원동석, 박용숙, 김해성 등 국내파 비평가들이 주도하였다. 70년대의 비평은 겉으로는 모더니즘 비평이 강세를 이루며 화단을 주도해 나갔지만, 그 이면에는 80년대를 점유한 민중미술 비평이 잠재해 있었다. 김윤수의 <한국회화사>(한국일보사, 1975)를 비롯하여 원동석의 <수화 김환기론>(1977, 계간미술 여름호),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1975, 원광문화 제2집) 등은 민중적 시각에서 미술을 해석, 비평한 이 시기의 대표적 문헌들이다.”13)

그러나 비록 현장비평가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방근택은 이른바 모더니즘과 민중민족미술이 대립을 이루는 80년대 공간에서 집필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80년 8월 2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84년까지 지속했다. 반공법 위반이 가져다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때로는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흘려 쓴 글씨로 당대의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지식의 흡수를 통해 시대를 관류하는 정신을 살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0년 9월에 ‘종말로서의 예술’을 하나의 화두로 일기에 기록한 이후, 그 징후와 실체를 폭넓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말년에 이를수록 방근택은 저술에 점점 더 집착했다. 그 결과물이 1985년에 미술연감사(대표 : 이재운)에서 나온 <세계미술사전> 권1이다. 이 지난한 작업은 1987년에 <세계미술대사전> 1, 2, 3권 완본으로 한국미술연감사에서 출판되었다. 제목만 세계미술사였지 실제로는 서양미술사였다.

이러한 저술 작업은 1950년대부터 수십년 간에 걸쳐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사회 등 각 분야별 사건을 연표로 정리해 둔 저본을 바탕으로 삼은 한 비평가의 지적 고뇌가 담긴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방근택은 그 외에도 루이스 A. 코저의 저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태창문화사, 1980)를 비롯하여 케네스 클라크의 <예술과 문명>(문예출판사, 1983) 등등 번역서를 필두로 자신의 저서인 <미술가가 되려면>(태광문화사, 1986)을 상재했다.

또한 비정형 회화를 둘러싼 초창기 한국 전위미술을 증언하는 일련의 회고록을 발표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일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공간, 미술평단, 미술세계 등 미술잡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91년 3월부터 회고록 ‘한국현대미술의 출발-그 비판적 회고>(1991-2)를 총 6회에 걸쳐 미술세계에 연재하고 같은 해 하반기에 간암으로 별세하였다.14)


12)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인 현장비평을 통해 비정형 회화운동을 독려한 방근택에게 박서보를 비롯한 작가들은 더 이상의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특히 1965년 파리에서 귀국한 미술평론가 이일(1932-1997)은 1966년에 교수로 부임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출신의 첫 제자들인 ‘무’, ‘신’전, ‘오리진’ 동인의 연합체인 [청년작가연립]전(1967.12.11.-6/중앙공보관 전시실)과 <AG>, <ST> 등 전위미술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비평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커미셔너를 맡은 제1회 [서울비엔날레](1974)를 전후하여 이일은 박서보가 주도한 단색화 운동에서 발군(拔群)의 비평적 기수 역할을 한다. 1975년 동경화랑 주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에 서문을 쓰는 등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비평이론을 바탕으로 ‘범(凡)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의 단색화를 해석한 이 일의 비평론은 단색화의 기초를 놓았다. 이 무렵 방근택은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사건으로 인해 무장해제된 상태였다. 특히 반공법 위반사건은 치명적이었다. 법적으로 집필이 금지된 상태는 비평가에게 곧 죽음을 의미한다. 60년대의 방근택에서 70년대 이일에게로 비평적 헤게머니의 이동은 비정형 회화에서 단색화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전후 세대에서 4.19 세대로의 화단 주류세력의 이동에서 다시 단색화 세대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군의 정치력과 화단 평정력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박서보였다. 1970년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에 취임한 박서보는 1977년에 화단 권력의 정점인 이사장에 당선된다. 무려 6년에 걸쳐 국제담당 부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앙데팡당](1972), [서울현대미술제(1975), [에꼴드서울](1975)의 산파역을 했다. 이 공간에 방근택의 자리는 없었다. 방근택은 <시문학>(1976년 12월호>에 박서보의 ‘묘법’을 비판하는 등 특유의 비평적 결기를 보였지만, 박서보와의 관계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13)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미술평단의 풍경 : 이념과 현실, 한국 미술평론의 역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8. 22쪽. 
14) 양은희, 같은 책, 4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