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청년작가 단체전 《살갗들》 “동시대 ‘회화’의 의미를 묻다”
학고재, 청년작가 단체전 《살갗들》 “동시대 ‘회화’의 의미를 묻다”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8.0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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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신관, 7.27~8.20
새로운 방식의 표현 속, 회화가 갖는 힘과 의미 고찰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가상현실, 증강현실, 가상 화폐 기술, 비대면 콘텐츠 등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의 콘텐츠들이 등장하고 있다. 동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큰 예술가들에게 있어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는 언제나 주목받는다. 오늘날 미술 현장에서 데이터 형식의 미술 작품을 창작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래하고, 소유하는 일도 놀랍지 않은 것이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왔던 ‘회화’가 좀 더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은정 KIM Eun Jeong, 여름, 봄 Summer-Spring,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62.2x336.3cm (사진=학고재 제공)
▲김은정 KIM Eun Jeong, 여름, 봄 Summer-Spring,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62.2x336.3cm (사진=학고재 제공)

학고재는 복제 이미지가 범람하는 지금의 매체 환경 속에서 유일함과 영원성의 가치를 설득하는 문제로부터 한걸음 떠나온 ‘회화’의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생각하는 전시를 기획했다. 그 의미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주는 길잡이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청년 세대 작가인 것도 이번 전시의 흥미로운 점으로 작용한다. 디지털 언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이들은 왜 회화를 표현 방식으로 택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일까.

학고재 신관과 온라인 전시공간 학고재 오룸(OROOM)에 지난달 27일 개막해 오는 8월 20일까지 청년작가 단체전 《살갗들》이 개최된다.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 속에서 회화의 의미를 새롭게 고민하는 자리를 만든다. 김은정(b. 1986), 박광수(b. 1984), 이우성(b. 1983), 장재민(b. 1984), 지근욱(b. 1985), 허수영(b. 1984) 등 6인의 작가가 신관에서는 32점, 온라인 전시공간에선 35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박광수 PARK Gwangsoo, 구리 인간 Copper Being,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50x65.1cm
▲박광수 PARK Gwangsoo, 구리 인간 Copper Being,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50x65.1cm (사진=학고재 제공)

전시는 지금 시대에서 ‘회화’를 사람이 만드는 불완전함과 순간의 흔적들의 기록과 노력으로 이해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미란 기획실장은 “회화가 주는 감동은 오히려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과 물감이 엉킨 그림자, 붓이 지나간 자리들을 살피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영원하지 않은 물성과 완벽하지 않은 행위, 살아 숨 쉬는 현재에 대한 애착이 회화의 이유가 된다.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총체적 장면이 주는 직관적인 기쁨 때문에 우리는 회화에 감명한다”라고 말한다.

새로움이 멈추지 않고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도 살아남아있는 고전적 매체들이 있다. 회화 역시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의 곁에서 깊이 있는 호소력을 지닌다. 손에 잡히는 물성과 부피, 질량을 지닌 회화의 표면은 마치 인간의 살갗 같기도 하다. 몸에 의해서만 행해지고, 몸을 통해서만 감각되는 회화는 촉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는 이의 정서가 물감에 실려 그 날의 붓을 타고, 그날의 감정으로 화면 위에 내려앉는다.

▲이우성 LEE Woosung, 경계를 달리는 사람 A Person Crossing the Border, 2018, 천에 아크릴릭 과슈 Acrylic gouache on fabric, 210x210cm
▲이우성 LEE Woosung, 경계를 달리는 사람 A Person Crossing the Border, 2018, 천에 아크릴릭 과슈 Acrylic gouache on fabric, 210x210cm (사진=학고재 제공)

전시는 ‘보이지 않는 힘’, ‘오늘과의 공명’, ‘촉각적인 세계’라는 주제로 6명의 작가 작품을 선보인다. ‘보이지 않는 힘’은 허수영, 지근욱 작가의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다. 허수영과 지근욱은 세상의 일부를 겪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전체를 상상해내는 작가다. 허수영은 우리 곁 눈에 보이는 모래알로부터 우주를 완성해나간다. 지근욱은 자신만의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대상을 명징하게 묘사하지 않고, 선의 반복으로 구조의 환영만을 화폭 위에 담는다. 완벽에 닿을 수 없는 몸과 어긋나는 계획 속 흔적을 남기는 궤적은 순간과 변화를 담아낸다.

▲장재민 JANG Jaemin, 꽃병 #5 Flower Vase #5,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7x91cm
▲장재민 JANG Jaemin, 꽃병 #5 Flower Vase #5,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7x91cm (사진=학고재 제공)

‘오늘과의 공명’은 이우성, 김은정 작가의 작품으로 구현된다. 이들은 회화적 화면에 겹겹이 쌓여있는 또 다른 이야기와 숨겨진 감정, 내밀한 언어들에 대해 집중한다. 이우성은 일렁이는 천의 재질을 활용해 화면 이외에 회화의 주변부를 인식하고 상상하게 한다. 작품이 그려진 천의 실밥을 발견하고 화면의 뒤편을 상상하게끔 유도해, 환영과 실재, 과거와 미래, 그리기와 살아감의 경계를 표현한다. 이우성의 회화는 삶에 관한 진솔한 고백이자 오늘에 대한 증언으로서 그와 닮은 이들의 일상에 공명한다.

김은정은 일상의 경험과 정서를 소재로 작업한다. 그의 작업은 작가가 보고 겪은 매일의 사건들이 캔버스 위에서 짜깁기되면서 형상을 갖춰 나간다. 김은정의 근작들은 “살아본 적 없는 시절과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완성됐다. 작가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반복되는 일들에 대해 상상하고, 각자 다른 곳에서 본 이미지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면서 매일의 오늘들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을 표현해낸다.

▲지근욱 Ji Keun Wook, 팽창하는 원기둥 05-22 Expanding Cylinder 05-22, 2022, 캔버스에 색연필 Colored pencil on canvas, 90x90cm
▲지근욱 Ji Keun Wook, 팽창하는 원기둥 05-22 Expanding Cylinder 05-22, 2022, 캔버스에 색연필 Colored pencil on canvas, 90x90cm (사진=학고재 제공)

‘촉각적인 세계’는 박광수, 장재민 작가의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다. 화면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들의 손의 흔적은 작가, 재료,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상케 한다. 박광수는 상처 내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물감의 점성을 가로지르며 기억하고 싶은 만큼의 속도로서 화면 위를 나아간다. 사라짐 때문에 영원한 기억, 불완전해서 의미 있는 만듦의 가치를 녹여 회화를 완성한다.

장재민은 보는 일과 그리는 일 사이의 여정에서 고민하고, 탐험한다. 시각적 풍경에 대한 의심이 청각, 후각, 촉각에 의한 경험을 증폭시킨다. 화면은 분방한 손의 흔적들로 가득하지만 완전한 추상으로 부서지지는 않는다. 윤곽은 형태를 놓아줄 듯 위태롭게, 그러나 꾸준하게 지탱한다.

▲허수영 HEO Suyoung, 우주 02 Space 02,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90.9x72.7cm
▲허수영 HEO Suyoung, 우주 02 Space 02, 202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90.9x72.7cm (사진=학고재 제공)

시대가 흐르면서 영원성의 상징이었던 회화는 이전 시대와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시대를 맞이하고, 회화는 또 다른 시대의 의미를 얻어가고 있다. 박 기획실장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매일의 한편에서 회화의 물성은 여전히 자라난다. 영원에 대한 바람을 미루어 둔 채, 오롯이 그 몸을 대하여 본다. 회화의 살갗이 지닌 자아는 비단 화가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라고 지금 회화의 의미를 말한다. 이번 학고재 기획전 《살갗들》은 지금 이 순간의 연약하고 뜨거운 인간의 생명과 살아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6명의 청년 작가들의 ‘회화’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