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부산은 서울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에 비해 역사가 그다지 깊지 못하다. 가령 한국 행위예술의 효시로 일컫는 1967년의 <가두시위>(1967.12.11)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12.14)이 벌어졌을 때, 부산에서는 1963년에 창립한 <혁>동인의 멤버들이 당시의 가장 첨단인 추상화 위주의 전위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부산이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지닌 대도시이긴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낙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두 해프닝이 벌어진 [청년작가연립전](1967. 12. 11-17, 중앙공보관)1)을 형성한 그룹 중 <신전> 동인의 멤버 김인환과 심선희가 부산 출신이긴 했지만, 그 이후 선구자격인 이들이 더 이상 해프닝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산에 퍼포먼스가 뿌리를 내리지 못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한국행위예술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그 중심지였다. 1960년대의 해프닝(Happening)을 비롯하여 70년대의 이벤트(Event), 그리고 80년대의 퍼포먼스(Performance)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행위작업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문화예술의 시설과 각종 기관들이 몰려있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 문화예술의 이런 편중 현상은 퍼포먼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2천년대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부천, 전주, 삼천포, 고령, 충주, 김천, 오산, 익산, 광주, 안동 등지에서 열린 ‘국제행위예술제’들이 그것이다.
Ⅱ.
2000년대 초반에 성백이라는 부산 퍼포먼스계의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부산의 행위예술은 소수에 의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 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나의 기억으로 80년대에 활동을 한 부산의 행위예술가로는 남순추가 유일하다. 그는 1986년에 서울 남영동에 위치한 아르꼬스모미술관이 주최한 [86행위설치미술제]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바탕골미술관 주최의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1986), 나우갤러리 기획의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1989) 등을 통해 퍼포먼스 작품을 발표하였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순추는 아주 개성이 강한 작가로 작품 발표회가 끝나고 이어지는 작가들의 뒤풀이에도 참석한 적이 없다. 바탕골미술관 주최의 행사에 참가한 그는 퍼포먼스가 끝나자마자 “서울역으로 간다”는 멘트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퍼포먼스 작업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의 퍼포먼스는 늘 쾌도난마식으로 간단명료했는데, 1989년 나우갤러리의 퍼포먼스 행사에서 그는 직육면체의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도끼로 깼다.
1990년대에 부산에서 활동한 행위예술가로는 이상진, 김춘기, 윤성원을 들 수 있다. 이상진은 일상과 예술의 통합을 꿈꾸는 작가였다. 일상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일상인 플럭서스 풍의 작업을 주로 펼쳐나갔다. 그의 퍼포먼스 작업은 위트가 있고 유머러스했는데, 자신의 상의 속에 옷걸이를 넣어 빨랫줄에 매달리는 형국을 연출한 ‘빨래’(1993)가 대표작이다.
2020년에 작고한 김춘기는 1999년 12월 31일 밤 10시에서 2000년 1월 1일 새벽까지 홍대앞 씨어터 제로에서 열린 필자 기획의 밀레니엄 기념 [난장, 퍼포먼스 페스티벌 1999-2000]전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다른 작가들의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극장의 입구, 화장실, 로비, 무대 등을 다니며 양면 테이프로 거미줄 형상의 구조물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계속해 나갔다.
1990년대에 이상진과 김춘기는 부산 행위예술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상진은 2004년의 부산비엔날레에서 행위예술 파트를 기획한 바 있으며, 2010년에는 부산항국제퍼포먼스아트페스티벌을 조직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후의 활동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김춘기 역시 부산행위예술가회를 조직하는 등 2010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202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1987년 7월 27일 제4회 [부산청년비엔날레]가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렸을 때, 개막식 행사의 일환으로 초청 퍼포먼스 실연을 한 적이 있다. 하얗게 호분을 칠한 얼굴에 검정색 선글라스를 쓰고, 검정색 정장을 한 나는 죽은 통닭을 팔에 안고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들과 묵언으로 소통을 시도하였다.
부산은 1974년에 [대구현대미술제]를 창설한 대구가 지척이고 바다 건너 일본과 잦은 문화예술 교류를 하면서도 퍼포먼스가 타지역에 비해 활기를 띠지 못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1) 청년작가연립전은 무, 신전, 오리진 동인으로 구성되었지만, 해프닝에는 ‘무’동인과 ‘신전’ 동인만 참가하였다. 멤버는 다음과 같다. ‘무’동인 : 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신전’동인 :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