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스페셜발레 ‘존재의 이유’와 정보경의 ‘안녕, 나의 그르메’
[이근수의 무용평론]스페셜발레 ‘존재의 이유’와 정보경의 ‘안녕, 나의 그르메’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1.1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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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조윤라, 제임스 전, 백연옥, 문영철, 김순정 등 다섯 명 원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출연한 스페셜 발레 ‘존재의 이유’(12,20~21,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를 보았다. 다섯 명 출연자가 각각 15분가량의 개인 작품을 보여준 후 ‘인생은 아름다워’란 공동출연작으로 마무리했다. 공연 중에선 김순정, 문영철, 조윤라가 보여준 작품들이 발레의 기본을 느끼게 했다. 세 작품 모두 2021년과 2022년 ‘한국춤작가 12인전’에 선보였던 작품들이다. 

‘…. 머물며 2022’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거쳐 30년간 대학 교단(청주대, 동덕여대, 성신여대)을 지킨 김순정이 자유롭게 의자들이 배치된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실연을 보이는 구도를 보여준 컨템퍼러리 발레다. 문영철(한양대 교수)의 ‘소풍’은 ‘백조의 호수’와 ‘빈사의 백조’를 흑조가 된 자신의 춤으로 보여준 후 천상병(故) 시인의 귀천(歸天)을 노래한 음악을 배경으로 서정적인 무대를 연출했다. 조윤라(충남대 명예교수)의 ‘내 마음의 수채화’는 “세월을 견디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느끼듯이/ 저물고 또 찾아와”란 대본처럼 발레와 함께 살아온 50여 년 시간을 담담히 보여준 수채화 같은 작품이었다. 모두 60을 넘긴 세 명 발레무용가들의 관리된 몸과 유연한 테크닉이 인상에 남았다. 

해설자(장승헌)가 15분을 할애하면서 자신과의 인연을 중심으로 출연자들을 장황하게 소개한 후 세 작품이 세계 초연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백연옥의 ‘꿈의 끝자락 III’, 강미선이 안무하고 김인희와 제임스 전이 춤춘 ‘산조(시절인연)’, 제임스 전이 안무한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언제부터 탱고가 발레 장르에 편입되었는지, 한국무용가의 안무로 발레무용가가 한복을 입고 추는 춤, 그리고 출연자들의 짜깁기 영상과 무대 콜라보레이션을 이어놓은 10분짜리 마무리 공연을 세계 초연이라고 강조한 것이 의아했다. 

대학에 있을 때 철학과 어느 교수가 교무처에 연구비지급신청서를 내면서 ‘연구의 목적’란에 ‘연구비를 받기 위해’라고 적었던 일화가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하는 ‘2022 원로예술인공연지원사업’ 신청서에 ‘4천5백만 원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라고 적어놓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들의 예술적 위트에 미소를 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보아주었을 것이다. 60대 원로 발레무용가들의 공동무대로 주목받았던 ‘존재의 이유’는 역설적으로 작년 10억 원가량이 지출된 ‘원로예술인공연지원사업’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서는 안 될 이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실망적인 기획이었다. 

원로무용가와 젊은 무용가가 보여준 대조적인 연말 무대

‘존재의 이유’를 본 사흘 후 ‘정보경’이 안무하고 출연한 ‘안녕, 나의 그르메’(12.23~24,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를 보았다. 춘천공연예술제에서 김주빈과의 2인무로 첫선을 보인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My Dearest Geureume, 2022, 8)'를 11명이 출연하는 60분 군무작으로 확장한 공연이다. ‘그르메’는 그림자의 옛말이다. 자유의지 없이 햇빛 아래서만 존재하며 누군가의 그늘에서 그를 추앙하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시간을 기다리는 숙명적인 존재가 그림자다. 정보경에게 그르메는 결별해야 할 과거인 동시에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다. 오랜 시간 품어왔던 꿈이며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고 싶은 미래의 희망이다. 그림자로서 살아온 삶에 안녕을 고하고 이제는 나만의 춤으로 홀로서기를 다짐하는 의지가 담긴 작품으로 내게는 읽혀졌다. 

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무대 가운데 커다란 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어린 소녀가 토끼처럼 나무 뒤에서 튀어나와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움직인다. 나무 앞쪽으로 곰의 탈을 쓴 거한이 소녀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들이 조우하면서 남자는 소녀의 그림자가 된다. 먼동이 트기 전 어둠 속에 그림자들이 춤추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존재들이지만 해가 뜨면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소녀가 먼 곳에서 이들의 춤을 바라보고 있다. 동쪽 하늘 가장자리로부터 먼동이 터온다. 아홉 명 그르메 들의 춤이 무대 가운데로 확장된다. 햇빛 쏟아지는 무대 가운데서 현란한 춤사위가 펼쳐진다. 배경술의 의상은 심플하면서도 현대적이다. 음악은 조용하면서도 변화가 있다. 전후좌우로 무대를 헤매는 춤은 힘과 속도가 있고 춤사위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정밀(靜謐)함 속에 스스로 절제하는 듯한 묵직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춤이다. 나는 누구일까, 이 자리는 어디일까, 내가 혼자 설 수 있을까. 바닥에 누워 공중으로 들어 올린 손을 흔든다. 그 손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고 자신들의 근원을 찾으려는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그림자가 자신을 옥죄던 탈을 벗어 던진다. 정보경∙김주빈의 코믹하면서도 다양한 춤이 밝은 조명을 받으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성균관대 무용과를 졸업한 정보경은 ‘임학선댄스 위’ 상임 안무가로 있으면서 한국춤과 현대춤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춤사위로 주목받아온 젊은 무용가다. 2019년 대한민국무용대상을 받은 ‘ONE, 源’과 듀엣 작품 ‘각시’(2021)에서 정중동(靜中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그녀가 ’안녕, 나의 그르메’를 통해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공감하는 순수하고 따뜻한 자신의 춤 세계를 정립해갈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