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7,80년대 한국연극계의 발전과 대학연극의 기여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7,80년대 한국연극계의 발전과 대학연극의 기여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3.01.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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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1960년대 후반기부터 움트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연극은 우선 각 대학의 대학연극이 시작한 열정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 연극과가 부재한 가운데서도 각 대학의 연극은 과 단위로 1년에 한편씩 비록 극장은 아니지만 대형 강의실에 무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서 연극을 올렸다.

특히 이화여대의 경우 영어영문학과의 희곡담당 교수였던 김갑순 교수의 연극 올리기의 열정은 다른 과, 예를 들어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등에 옮겨 붙어 대학 내에 끊임없는 연극공연이 올려졌다. 이러한 연극 열정은 탈춤을 섣부르게 빗대어 정치비판의 기구로 응용하는 학생운동을 보며 연극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불려 일으켰다. 그리하여 연극과 담당교수들이 새로운 연극교육 과정을 열기로 하는 데서 학과의 경계를 넘어 연계과정의 강좌를 설치하게 된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더 나아가 대학연극에 관심을 모았고 더 나아가 <대학극 경연대회>를 만들어냈다.

대학극 경연대회는 때마침 서강대학에 새로 건축된 강당 겸 극장 구실을 할 만큼 크고 넓은 공간에 각 대학이 경연에 참여하고, 우열의 결과를 기다렸다. 70년대 초 중반으로 갈수록 학생들의 운동권 참여의 열정은 점점 타올랐다. 연극이 예술로서의 완결에 관심의 초점이 가기보다 오히려 당시 안기부를 통해 감독 감시하려는 정부에 반항의 깃대를 표현하기에 열정을 다하는 젊은 혈기를 보였다. 그래서 연극예술의 완결성을 통해 시대정신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기 위해, 연극담당 교수들은 학생들의 관심을 연극의 형식과 내용을 담도록 유도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내에는 이러한 시대적 물결을 감당할만한 뭉친 힘이 작동되지 않았고, 이화여대가 선두를 달리며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 등이 대학극 경연대회에 주요 참여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화여대 문리대 독어독문학과 연극당당 교수로 있던 나는 마침 영문과의 연극담당 김세영 교수가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으로 취임하시는 기회를 보고 국어 국문과의 연극담당 김호순 교수님, 불어불문과의 정병희 교수님, 독어독문과의 양혜숙을 모아 5개 과의 교수들이 함께 연극교육을 위한 연계과정을 열자고 제의했다. 이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150명 정도의 연극에 관심 있는 학생을 위한 강좌를 열기로 했는데 학생들의 연극과 등록상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화여대 연극 최초 개설, 학생 관심 폭증,
전국 대학 연극반 개설 확산, 평론계와 연극발전 중추 역할

150명 정도의 연극을 위한 연계과정의 학생을 기대하며 개강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연극강좌에 등록한 학생들이 근 600명에 달하였다. 놀란 연극담당교수들은 다시 논의하여 150명 단위의 연극반을 4개로 늘여 설치했고 학기가 바뀔 적마다 그 수가 늘어 3,4학기가 지날 적에는 1,650여 명에 육박하였다.

결국 나중에는 1,650명으로 선을 긋고 꽤나 오랫동안 이 연극을 위한 강좌는 유지되었다. 타 대학들도 이화여대의 경우를 본떠 연극을 위한 연계과정을 열어 훌륭한 연극인 양성과 더불어 훌륭한 관객을 키워내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개설된 연극과 강의 안에는 현장에서 활약하는 극작가, 배우를 통한 연기교육, 무대미술 도입, 무대의상 등 연극과 관계되는 많은 분야를 연계했고, 현장과의 연계도 교육에 도입했다. 이는 한국의 관객교육과 더불어 질 높은 연극의 보편적 교육의 바탕을 펼쳐놓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다행히도 관객의 수와 질의 높이가 대학연극의 교육강좌를 통해 발전하고 있는 한편 1958년 태동하기 시작한 연극의 국제교류는 최초로 스페인과 핀란드에서. 열린 ITI 총회를 통해 연극대학 설립의 시동을 걸었다. 유치진 선생님이 세운 남산 동랑예술대학이 제자리를 잡아가며 연극을 비롯한 예술대학으로 자리 잡아갔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유덕형, 유인형 남매와 안민수 연출(유치진 작가의 사위이며 유인형의 남편)은 한국 연극계에 큰 도약을 가져온다.

특히 1970년대 초반 유덕형 연출, 오태석의 작품 <태>와 유덕형 작 안민수 연출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등은 한국 관객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예수정과 같은 걸출한 여배우도 태어나게 하는 큰 걸음을 한국연극계에 선사했다. 아울러 한국의 1970년대 초 중반에 이르며 한국의 연극계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를 맞이한다. 한국연극계의 활발한 역동성은 한국연극 평론계에도 영향을 끼치며 평론활동을 활발하게 유도해 내 이태주, 이상일, 한상철, 양혜숙과 같은 평론가들을 배출해 냈다. 이들은 여석기 교수와 같은 윗세대를 화려하게 이어가며 오늘날까지도 연극발전을 이어가는 중추가 됐다.


*지난 호 <내가 만난 한국의 극작가들> 중 극작가 김상경을 극작가겸 연출가 김상열로 표기했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