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 홍종구ㆍ정옥희 부부 “비어 있음으로 완성되는 삶, 천천히 품격있게”
[Culture Interview] 홍종구ㆍ정옥희 부부 “비어 있음으로 완성되는 삶, 천천히 품격있게”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1.11 12: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편 그림과 부인의 애장 예술품으로 향기가득한 ’예술가의 집‘
화가 남편, 시낭송가ㆍ교육자 아내
선비 같은 남자, 콧선이 아름다운 여자의 만남
홍종구 작가, 은퇴 후 그림으로 목우회원 등 제2 인생 황금기 맞아
시낭송가 아내, 화가 남편의 첫 번째 비평가, 교감 큰 기쁨
다가온 새해, 스스로 돌아보며 마음가짐 정갈하게 여미는 ’예절의 울림‘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이하는 세밑에 문화예술을 사랑하며, 아름다운 삶을 실천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봤다. 2021년 목우미술대전에서 목우이사장상을 받고, 목우회 정회원으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홍종구 작가와 우리나라 예절 교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예지원(禮智院)의 교육부장, 수석 전임지도위원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예절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옥희 원장 부부다.인터뷰는 부부의 자택에서 진행됐다. 자택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홍 작가의 작품 <겨울 나들이>다. 작품은 분명 눈길을 담고 있는데, 그림에서 전해지는 분위기는 따스하다.

▲홍종구 작가와 정옥희 원장 부부 ⓒ서울문화투데이
▲홍종구 작가와 정옥희 원장 부부 ⓒ서울문화투데이

부부가 해외여행을 다니며 수집한 소품과 정 원장 친구 수채화 작품이 놓인 공간은 예술의 향기로 가득했다. 특히, 거실로 들어서기 전 만날 수 있는 석불 정기호 선생의 <茶爐(다로)> 글씨는 두 부부의 공간이 단순히 생활을 위한 거실이 아닌, 차를 즐길 수 있는 ‘다실’로서의 역할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거실 중앙에 놓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는 부부의 삶과 동행하고 있었다. 정 원장은 이광사의 글 중 “頭白燈明裏 何須花燼繁(등불 아래 머리 더 희어지니/ 꽃다운 시절이 다시 오리오)”라는 문장이 인생의 한 부분으로 깊이 느껴져 특히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석불 정기호 선생 글씨 <茶爐(다로)> ⓒ서울문화투데이

홍종구ㆍ정옥희 부부와의 인터뷰는 따뜻한 차와 함께 진행됐다. 찻물을 우리고, 또 우려내면서 두 사람의 자분자분한 인생 이모저모를 들어볼 수 있었다. 차분하게 이어진 대화 속에선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품격과 고귀함이 느껴졌다. 홍 작가는 자신이 말을 잘 하지 못해, 인터뷰가 걱정된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얘기하고 가치관을 얘기함에 있어서는 막힘없이 풀어냈다. 정 원장은 오랜 교육자의 경험으로 정제되고 부드러운 언어로 지금 시대에 필요한 ‘예절’이 무엇인지 말했다. 두 부부는 인터뷰 중 노자의 “當其無 有器之用(당기무 유기지용)”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그릇의 속이 비어있음으로 인해 그릇의 쓰임이 생긴다’는 말을 통해, 끊임없이 채우기보다 내 쓰임이 다 할 수 있도록 비우고, 만족하는 삶을 항상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해왔지만, 이처럼 한 평생을 함께 살아오며, 함께 문화예술 가꿔온 부부의 인터뷰는 처음으로 진행했다. 본인들의 인생을 담백하게 살아온 부부의 이야기는 다가온 새해에 우리의 마음을 정갈하게 다듬고,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르게 다잡을 지를 생각게 하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하 질문에 답은 편의상 부부 각 각의 성으로 표기했다.

▲홍종구, 겨울나들이, 117X90cm, 한지에 수묵채색 (사진=목우회 제공)

두 분은 원래부터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는가.

(홍) 나 같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미술계통으로 진학을 할 순 없었다. 사회생활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작품을 시작해볼 수 있었다.

(정) 나는 국문학도였는데, 학부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림에 대해서는 젊었을 시절부터 갤러리에 그림을 보러 다니는 것을 참 좋아했다. 부산에서 교직생활을 할 때, 퇴근을 하거나 휴일이 되면 항상 광복동에 나가 그림을 구경했다. 갤러리에 있는 리플렛을 모아뒀다가 철마다 새롭게 장식하는 것이 내 즐거움 중 하나였다. 최근에도 인사동 갤러리를 자주 나간다. 학고재에서 전시하는 그림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그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자주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할 따름이다.

홍종구 작가는 어떻게 그림을 시작하게 됐는가.

(홍) 대학을 이공계로 진학했고, 서울에서는 전기 사업을 했었다. 은퇴한 지는 13년이 돼가고 있다. 은퇴 이후에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그림을 시작했다. 그 과정 속에서 향묵 최종진 선생을 만나게 돼, 그림을 사사했다. 

▲자택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작업 모습을 보여주는 홍종구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자택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작업 모습을 보여주는 홍종구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올해 《2022 목우미술축전(MWAF/무아프)》에도 참가했는데, 감회가 어땠는가.

(홍) 목우회의 위상은 정말 대단하다. 목우회의 회원이 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5년 간 도전을 했고, 2019년에 입선, 2020년 특선, 2021년에 이사장 상을 차례로 수상할 수 있었다. 2022년에도 특선을 수상해 목우회 회원이 됐다.

(정) 남편이 다른 상도 많이 수상했는데, 그 중 목우회의 상을 가장 좋아한다. (웃음) 남편이 미술을 시작하고 나서, 조용히 어딜 가서 상을 타오고 또 타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이 놀랐다. ‘진도 소치 미술 대전’에서 최우수상도 수상했고, ‘현대관악미술대전’에서도 수상을 했다. 내 제자 중에 한 명이 남편에게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말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웃음).

(홍) 올해 《2022 목우미술축전(MWAF)》에서는 기존 한국화 작품에서 시대에 맞게 변화를 해보고 싶었다.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걱정이 참많았다. 하지만 정말 많은 이들이 좋아해줘서 용기를 얻었다. 내 스승 최 선생님과는 조금 다른 경향을 띠게 되긴 했지만, 스스로 변하고 있는 방향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정) 남편이 새로운 화풍으로 그린 ‘스위스 마테호른’이 있는데 <설산>이라는 작품이다. 내가 정말 좋아한다.

(홍) 스스로도 좋아하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너무 직선의 선이 아쉽다고도 하는데, 앞으로도 저런 느낌을 가진 작품을 꾸준히 시도해보고 싶다. 최근에 무아프를 준비하면서, 이번에 작업한 작품을 메시지를 통해 친구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친구들 답장 중에 ‘마음이 아련해지면서 따스해진다’, ‘정말 순수한 미술 작품을 마주한 느낌이다’라는 말들이 있었다.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 찬사였다.

▲홍종구 작가 작품, (좌측부터)  〈설산〉, 〈만추〉
▲홍종구 작가 작품, (좌측부터) 〈설산〉, 〈만추〉 (사진=홍종구 작가 제공)

정 원장은 시인이자 시낭송가다. 특별히 ‘시’를 공부한 적이 있는가.

(정) 학부시절에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를 공부했다. 이후에는 교사 생활을 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를 접할 시간이 많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딸의 <한국일보 어린이 낭송 대회>에 따라갔다가, 어머니 부문이 있어서 도전을 하고 수상을 하면서 ‘시 낭송’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의 꿈이 아나운서였는데, 고향이 경상도 쪽이다 보니 발음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 장래희망을 포기했다. 그런 꿈이 모여서 시 낭송을 시작하게 됐던 것 같다. 1992년에는 본격적으로 대회를 준비해서 전국어머니시낭송대회 최우수상 및 금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서초구청 <시낭송의 밤>, 옥천문화원 시인 정지용 <지용제>, 의정부 예술의 전당 <시인 천상병예술제> 무대에서 시낭송을 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의 날> 행사도 많이 참여했는데, 할 때마다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이다.

내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행하고 있는 모습은 ‘교육자’이지만 ‘시낭송가’ 역시 나의 소중한 자아 중 하나인 듯 하다. 요즘 사람들 말로 ‘부캐’라고 하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2012년 『서울문학』에 시 <동백꽃>으로 등단하면서 시인의 꿈도 이루게 됐다, 이 때쯤 내게 정말 중요한 분인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런 마음을 담아 시를 쓰고, 등단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내게 마치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과 안정감을 주는 장르라고 여겨진다.

▲前동국대 차학과 교수 묵초 박희준 시인이 정옥희 원장에게 써준 글귀, 정 원장은 자신이 교육한 학생과 지인들이 전한 글귀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한다.
▲前동국대 차학과 교수 묵초 박희준 시인이 정옥희 원장에게 써준 글귀, 정 원장은 자신이 교육한 학생과 지인들이 전한 글귀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한다.

정 원장은 한국예절교육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어떻게 ‘예절’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예지원(禮智院)’과의 인연도 듣고 싶다.

(정) 예절교육의 시작은 ‘다도’로 시작하게 됐다.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교사로 계속 근무를 했었다. 그 시절에는 여자가 자신의 일을 갖고 있는 것이 그다지 보편적인 시절이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교사를 그만두게 됐고 1979년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서울에 올라와서, 남편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랑스러운 두 딸 아이를 낳고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편으로는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항상 공부할 때가 좋았다. 그런데 30대 초반에 딸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크게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 때 집에서 몸을 보살피면서, 무리하지 않으면서 시작해볼 수 있는 공부에 대해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예지원 다도반 교육’에 대해서 알게 됐다.

다도 공부를 하면서, (사)예지원의 강영숙 원장님을 만나게 됐고 ‘교육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살게 됐다. 예전부터 정적인 것을 좋아했는데, 교육을 시작하면서 내게 딱 맞는 옷을 입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텐데, 당시 남편과 시부모님의 도움도 큰 힘이 됐다. 예지원에서는 20년 넘게 교육자로 있었고, 예지원 교육부장 및 수석 전임지도위원을 맡았었다. 이후 한국예절교육원을 개원해 예절 교육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로 교육을 진행하지 못했다.

▲차를 따르는 정옥희 원장 ⓒ서울문화투데이
▲차를 따르는 정옥희 원장 ⓒ서울문화투데이

당시 ‘예지원(禮智院)’에서는 어떤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는지 궁금하다.

(정) 시부모님이나 부모님 손에 이끌려오는 예비 신부들이 많았다. 예지원에서는 실제로 어른들을 대하는 방법이나, 생활 예법, 상차림에 대해서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만은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은 정말 큰일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이 만나 서로의 반려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른이 돼서 자신들의 선택으로 결혼을 택한다고 하지만 예비 신랑, 신부는 여전히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지원은 시간을 들여 결혼에 대한 마음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먼저 인생을 살아온 이들의 삶 속 지혜를 들으며 ‘예절’을 다시금 정립할 수 있게 한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하는 가족들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 형성을 해나갈지 배우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최근에는 남녀평등이 중요시되다 보니, 남녀가 서로 반목하고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예절교육’도 사라지고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크다. ‘예절교육’이란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주어진 생을 어떻게 아름답게 살지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차 한 잔을 우려 마시는 이 ‘다도’도 큰 행위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굉장히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을 좀 더 아름답게, 나와 우리를 위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예절 교육’이다.

최근엔 ‘예절’이 고리타분한 것, 꼰대스러운 문화라고 느끼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런 경향을 어떻게 보는가.

(정) 나는 항상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뀌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효(孝)사상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본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민하다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시작을 생각하고 조상을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라면, 우리가 시작된 지점을 떠올리고 존중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성균관에서 제사 형식을 축소하는 방법을 발표했는데, ‘왜 이제 와서 저런 발표는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제사음식은 조상을 위해서 만드는 음식이긴 하지만, 제사가 끝나면 자연스레 우리 후손이 먹고 즐긴다. 결국 우리가 먹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마련하는 과정이다. 현대에 맞지 않는 것은 점차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왜 과거의 것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드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면서 내일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단절하면서 나아가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꽤 오랜 시간 ‘예절 교육’을 진행해왔다. ‘예절’을 공부할수록 긍정적인 지점이 있다면.

(정) 예지원에서 근무할 당시, 수강생들 중에는 자신이 왜 이런 교육을 받아야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수업을 지루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3개월의 수업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의 표정이 점차적으로 밝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삶 속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듣고, 일상 속 많은 부분을 다시금 정비하면서 스스로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나는 아직도 예지원에서 근무했을 시절 학생들이 전한 편지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정말 예쁜 말들이 많이 담겨있는데, 하나같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한다. 예절 교육을 하다보면 말도 좀 더 곱게 사용하게 되는데, 말이라는 것이 결국 메아리처럼 울려서 우리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온다고 본다. 결국 바르고 정갈한 말, 행동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예절은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새로운 것이 많고 교육적인 면이 많다. 어떤 이들은 예절이 3년 교육과정으로 공부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더욱 깊이가 느껴지는 학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곧 다가오는 ‘설’에 대한 어원을 얘기하고 싶다. ‘설날’의 ‘설’은 ‘서럽다, 낯설다’라는 뜻에서 시작됐다. 지나가는 해에 서러움을 느끼고, 다가오는 시간에 낯섦을 느끼는 때인 것이다. ‘설날’이 있는 음력 정월도 왜 ‘정월(正月)’이라고 하는지 찾아보면, 한해의 첫째 달을 바르게 시작하자는 뜻을 갖고 있다. 때문에 옛 조상들은 새해 첫 날에는 집에서 근신하며 새로운 한 해를 바르게 시작할 준비, 앞으로를 살아갈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런 뜻들이 지금 세대에게도 전해진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다른 모습을 지니지 않을까 싶다.

▲원교 이광사 글씨,
▲원교 이광사 글, 정옥희원장은 고희가 지나 마지막 구절 “頭白燈明裏 何須花燼繁(등불 아래 머리 더 희어지니/ 꽃다운 시절이 다시 오리오)”에서 특별한 울림을 얻었다고 말한다. (사진=정옥희 원장 제공)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명절에 잊지 말고 가족 간의 지켜야 할 예절이 있다면.

(정) 가족 간에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배려다. 대부분의 문제는 서로를 존중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예를 갖춰야한다. 그리고 설날을 맞이해서, 세배 예절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요즘 설날에 흔히들 아랫사람이 어른들에게 ‘절 받으세요.’라는 말을 하곤 한다. 설에는 아랫사람이 먼저 인사를 제안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어른이 먼저 자리에 앉으시고 난 다음에 세배를 드리고 나면, 어른께서 먼저 덕담을 하고난 다음에 아랫사람이 인사말을 한다. 평소 때 어른을 찾아뵀을 때는 아랫사람이 먼저 인사말을 한 다음 어른께서 인사에 답하는 것이 예절이다. ‘~하세요.’라는 화법은 어른에게 사용하면 안 된다.

문화예술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두 분이다. 어떻게 인연을 맺어 평생을 함께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홍) 70년 대 우리 때에는 다 그렇듯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됐다. (웃음)

(정) 당시에 우리 남편은 동명목재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나는 성동중학교에 국어 선생님으로 있었다. 어머니 두 분이 경남 여고 선후배 관계셨고, 양산이라는 같은 고향을 두고 있어서 만남이 쉽게 이뤄졌던 것 같다.

두 분은 서로 어떤 부분에 끌리셨나.

(홍) 전체적으로 지적이고,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 좋았던 것 같다. 나와 성격이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마 선과 콧선이 정말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 당시 교사로 있어서 선을 많이 봤다. 선을 본 사람 중에 대구에 사는 분이 있었는데, 내게 상당히 호감을 표현했었다. 하지만 나는 잘 끌리지 않았다. 나는 좀 샤프하고 날씬한 사람이 이상형이었는데, 그 때쯤 남편과 선을 봤다. 안경을 끼고 있었고 조용한 모습을 한 남편의 첫 인상에 많이 끌렸던 것 같다. 

(홍) 아무래도 가장 마음이 가 닿아갔던 점은 내면적인 점이었던 것 같다.

▲<설산> 작품 앞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홍종구 작가와 정옥희 원장 부부 ⓒ서울문화투데이

홍 작가, 정 원장 두 분 다 자기 분야에서 성실히 살아왔고, 또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서로 창작을 하거나 교육을 하는 데에 있어서 조언을 주기도 하는가.

(홍) 아내는 내 첫 번째 비평가이다. 작품을 완성하면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는데 정말 섬세한 평가를 해주고, 날카로운 지적도 스스럼없이 한다.

(정) 나는 무엇을 알고 그림에 대해 얘기한다기보다 느낌을 얘기해주는 것뿐이다. (웃음)

(홍) 하지만 그림을 함께 보고 얘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기쁨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제목을 짓곤 하는데, 작품에 대한 이야기나 각자의 철학 등을 나누는 대화가 정말 소중하다.

(정) 최근에 남편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상을 시작한 작품을 완성했다. 남편은 그 작품의 제목을 <적막>이라고 지었는데, 내가 <어떤 적막>이라는 제목을 제안했다. ‘적막’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그런 수많은 ‘적막’ 중 하나인데, ‘어떤’이라는 관형사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적막’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봤다. 스스로 제안하고 도움이 된듯해 정말 기쁜 순간이었다.

계묘년, 새해가 시작됐다. 신년에 두 분의 계획을 듣고 싶다.

(홍) 전시들이 다시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올해에는 전시에 좀 더 열심히 참여하고, 기회가 된다면 개인전도 준비할 생각이다. 또한, 최근에 작품의 경향을 바꿨는데 새롭게 시작한 시도를 잘 갈고 닦아 좋은 작품을 많이 완성하고 싶다. 항상 아내가 하는 말이 있다. ‘겸손하세요’라는 말인데, 스스로도 항상 ‘겸손’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내려가는 일만 있다고 본다. 적당한 자신감을 갖고 천천히 오래 작업을 해나가고 싶다.

(정) 맞다. 나는 남편이 너무 ‘최고’는 되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높은 위치가 되면 힘들어지고,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건강의 우선이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본다.

나는 팬데믹으로 진행하지 못했던 예절 교육을 올해부터 다시 시작하려 한다. 백혜선 피아니스트가 서울대 음대 교수직을 내려놓으며 한 말이 있다.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다시 연주해야죠.”라는 말이었는데, 나는 이 말을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다시 교육해야죠.”라는 말로 바꾸고 싶다.

지난 3년 간 예절교육을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생각해 보니, 나는 교육할 때가 가장 좋았고, 내 존재가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했고, 그 지식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서, 나라도 먼저 ‘예절’의 중심을 잡고, 우리 스스로가 좀 더 선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끝으로, 우리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건강하게 오래 이 일들을 즐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