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비평에 관한 나의 변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비평에 관한 나의 변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3.02.1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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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내가 하는 이 일이 미래의 미술사를 위한 작은 밀알이 되었으면 한다.

이 일이란 비평, 즉 미술에 관한 비평이지만, 반드시 미술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회비평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다.

사회비평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다는 말은 미술이 사회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 사람의 작가이기 이전에 사회인이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함의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제작에 필요한 자양분을 세상을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삶의 토대인 사회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다.

작품은 이처럼 경험의 총화요, 다양한 경험들이 작가의 삶 속에서 용해되고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담즙에 의해 소화, 흡수되는 가운데 생성되는 생명체인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낳는데 산고가 있듯이, 미술평론가 역시 비평을 하는데에는 정신적 고통이 따른다. 물론 미술평론가의 과업인 비평의 대상이 반드시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현상들을 비롯하여 미술제도, 그리고 비평의 비평인 메타(meta) 비평도 있다.

비평가는 시대와 함께 살아간다. 특히 현장 비평가는 전선의 최전방에서 적정을 살피는 척후병처럼 당대의 변화를 예민한 촉수로 감지하고, 그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확히 파악하여 비평에 반영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이 보병에 해당하는 작가들과 행동을 같이 하여 때로는 사선을 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아방가르드의 본령인 '도전과 저항의 정신'인것이다. '도전과 저항의 정신'은 시대의 첨병으로써의 비평가와 작가가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금과옥조이다.

비평가는 세속의 이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세속적 이익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비평적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눈을 맑게 하기 위함이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면 비평안이 흐려진다.

 

이익 배제한 글이 설득력과 품격 갖춰

 

텍스트(text)의 대상인 작품과 예술현상이 뿌옇게 보이면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 자신을 속인 글이 남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고 글을 쓰면 그 사심이 글의 행간에 묻어나오니 이는 설득력도 없을 뿐더러 글의 품격이 낮아지니 경계할 일이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독서는 얻는 바가 적다. 설혹 지식을 얻는다 해도 그것이 제대로 몸에 흡수돼서 소화가 되지 않는다면 마치 설익은 밥처럼 겉돌 것이다.

비평가가 주체성을 갖는다 함은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머리로 생각하여 올바른 식견을 쌓는 것을 이름이다. 발달된 외국의 이론과 사조를 받아들이되 충분히 소화, 흡수해서 정론을 펼 일이다.

1999년의 어느날 호남대 연구실에서 루카치의 책을 읽다가 내팽개치고는 한 동안 책을 멀리하였다. 그 후 국내의 작가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오로지 사유와 직관의 힘으로 밀어부치는 일을 아주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나의 비평글에 외국의 이론이나 이름이 드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서양인 학자나 평론가의 이론을 적용하여 국내의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평생 쌀만 먹은 사람들과 밀가루만 먹은 사람들은 유전자가 다르다. 밀가루로 쌀을 재단하지 마라. 밀가루에게는 그만의 양식(style)이 있고 쌀에게는 쌀의 양식이 있다. 그러니 전자의 양식으로 후자의 양식을 재단하거나 비교하여 확정하는 것은 미술사가가 피해야할 금기 가운데 하나다.

칼은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자신을 베게 된다. 특히 살아서 펄펄 뛰는 생선을 다룸에서랴!

현장비평의 가장 높은 경지는 애린의 실천이다. 이는 마음의 이끌림에서 온다. 아무리 비천하고 곤궁하더라도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가가 있으면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예술에 재능이 있나 살펴보고 일단 소신이 서면 보살펴야 한다.

나의 경우는 배남한 작가가 이에 해당하니 실로 기묘한 인연으로 만나 10년을 지켜봐 왔다. 그 고난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랴! 한 명의 작가를 구하면 100명의 작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작가는 여리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들이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자존심에서 나온다.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의 작가라는 자부심이 없다면 형극과도 같은 예술의 길을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비평가는 때로 그 자부심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해야할 때도 있다. 비판보다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편이 좋다. 선생이 되려 하지 말고 친구나 조언자가 되도록 힘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