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수프와 이데올로기」 : 생각이 다른 식구(食口) 모녀이야기
[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수프와 이데올로기」 : 생각이 다른 식구(食口) 모녀이야기
  • 황현탁 작가
  • 승인 2023.02.1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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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태생의 재일교포 여류감독 양영희(梁英姬)의 네 번째 다큐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공개되었다. 2006년에 상영된 첫 번째 영화 <Dear Pyongyang>은 한국에서 개봉되기 전 일본에서 보았다. 이번 영화 역시 ‘재일동포가 겪는 이데올로기 비극’을 다루고 있다. 양 감독은 2011년 <굿바이 평양>, 2013년 <가족의 나라>에 이어, 10년 만에 이번 영화를 제작하였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포스터 (사진=황현탁 제공)

치매로 혼란을 겪는 양 감독 어머니의 인생역정이 중심을 이룬다. 2009년 작고한 남편 생존당시 딸의 결혼과 고향·가족에 대한 생각, 딸인 감독의 12살 연하 일본남자와의 결혼, 한국국적을 취득한 감독과 달리 조총련간부의 아내로 조선국적으로 고향인 제주도를 방문하는 여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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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 중 사위를 위해 닭백숙준비 장면 (사진=황현탁 제공)

아버지어머니는 3남1녀 중 아들 셋을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으로 보냈으며, 딸인 양 감독만을 무남독녀처럼 여기고 살았다. 일본의 세 가족은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였고, 그것이 양 감독이 다큐영화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북에 있는 아들과 손주들 생각에 아버지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수시로 생필품을 보냈다. 가산을 정리한 후에도 계속 보내자, 딸은 “어머니는 할 만큼 충분히 했다. 북의 가족들도 어머니 마음을 알 것”이라고 말하나, 어머니는 가족에 대한 의무감에서 단념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조총련간부로 맏아들의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까지 데려올 정도로 북한에 많은 기여를 했다. 김일성과 함께 사진도 찍었으며, 그 사진은 어머니가 기거하는 방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는 대동강변 풍경사진도 함께 걸려있다. 낮은 장롱 위에는 아버지 사진과 조그만 크기의 북의 가족사진들이 놓여 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나온 결혼식 사진 (사진=황현탁 제공)

아버지는 생전 ‘일본 놈, 미국 놈과의 결혼은 안 된다. 일본에 사는 조선 사람은 괜찮다’고 했다. 그는 생전에 상속문제 등을 고려, 집을 부인명의로 돌려놓고 문패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는 평소 “일출은 성산, 낙조는 사봉, 영실 산방에 명승이 종종, 한라산 허리에 흰 구름 좋다 … 섬나라 이 땅 살기도 좋구나 … ”로 이어지는 제주도 자랑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진에 공양을 올리거나 사진 속 남편과 대화를 나눈다.

양 감독은 아버지의 염원과 달리, 12년 연하의 39세 나가노 출신 ‘일본인’ 기자와 결혼한다. 50이 넘은 딸이 짝을 찾는다니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을까! 네가 본 네 편의 양 감독 영화 중 ‘진심으로’ 가장 유쾌해하는 장면이었다. 북한의 가족들에 대한 노심초사로 진정한 기쁨을 나타낼 수 없는 어머니·할머니로만 살아왔다. 사상은 맞추려 노력했지만 일상은 함께하지 못해 회한이 쌓였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중 제주도 여행 (사진=황현탁 제공)

도쿄에서 장모에게 첫 인사를 드리러 양복을 입고 온 예비사위에게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으라고 권하고, 정성스레 인삼과 대추, 마늘을 잔뜩 넣은 닭백숙을 만들어 대접한다. 사위는 아버지 영전에 일본의 고급 양주를 병 채로 공양하며, 장례업체에서 86세 장모에게 ‘장례식견학 초청장’을 보내오자 전화해 ‘나이 많은 노인에게 무례한 짓이 어디 있느냐?’며 호통 친다. 아들 노릇을 한다.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찍은 결혼사진을 죽으면 관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다.

어머니는 18세에 관덕정에서 시작된 제주4.3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쳤다. 어머니는 정혼한 상태에서 사건이 터지자 어린 여동생을 업고 남동생과 함께 30km를 걸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의사였던 정혼자는 사건 발생 후 산(山)부대를 돕다 사망했다. 사건당시의 증언을 수집하기 위해 제주4.3연구소 관계자들이 오사카 어머니 집을 방문한다. 어머니는 치매가 진행되어 당시 상황의 증언은 불가능하다.

딸은 어머니생전에 고향방문을 계획하고 임시여권을 발급받아 남편과 함께 애월읍과 4.3평화공원을 찾는다. 평화공원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곳에는 어머니 외삼촌과 정혼자 이름은 없고, 정혼자 아버지 이름만 보인다. 살아남은 정혼자 동생은 신고하여 형의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단다. 치매노인은 휠체어에 의지, 파도를 바라본다. 바다의 파도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쉼 없이 계속되지만, 인간의 사고력은 어느 시점에서 수명을 다한다. 추억하지 못하는 치매환자에게 과거로의 여행은 딸의 소망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영희 감독 영화 (좌측부터)
▲양영희 감독 영화 (좌측부터) 2006년 <Dear Pyongyang>, 2011년 <굿바이 평양>, 2013년 <가족의 나라> (사진=황현탁 제공)

오사카로 돌아온 어머니는 북한의 가족들을 위해 익혔던, ‘김일성의 아버지어머니인 김형직과 강반석’이 들어간 북한노래는 곧잘 부른다. 그 모습을 본 양 감독은 애잔한 눈물을 흘린다. 딸은 남편과 함께 어머니가 기거하던 방에 걸린 아버지의 기념사진과 북한 풍경사진을 뗀다. 역사의 질곡 때문에 남의 나라 일본에서 남북간 이데올로기 대결을 벌이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북쪽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여 신념과 양심의 불일치로 마음 졸였던 세대들 역시 한 분 두 분 타국에서 서서히 생을 마감하고 있다.

지난 70년을 부대꼈음에도 도돌이표가 된 오늘날의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억지 춘향식의 남북간 이데올로기 화해보다는 각자도생에 나서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반쪽인 남쪽에서만이라도 백년대계에 대한 공감대 형성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정치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개개인이 ‘양심과 상식에 근거하여 투표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사탕발림이나 선의에만 나라의 장래를 맡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