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상실의 경계에서 만난 빛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상실의 경계에서 만난 빛
  •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 승인 2023.02.1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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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여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달리는 차 안에서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녀는 며칠 전 시모가 주신 살구가 속상하게도 다 상해 있었다는 말을 하며 몰래 마트에서 사다가 잼을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주신 분 마음 상하지 않도록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종의 창조적 다짐이기도 했다. 하필 지나는 길가에 살구가 소복하게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사방으로 날리니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샛노란 살구를 치마 가득 주웠다. 물론 살구는 그녀에게 다 몰아주었다. 며칠 후 “살구잼 한통 가져가세요” 문자가 왔다. 어느 바람 부는 날, 버려진 살구로 밤새 잼을 고아 정을 나누고야 마는 따스한 여인이었다. 작가 이정여의 삶과 그녀의 작품세계가 새삼 궁금해졌다.

시들어가는 것의 소중함

작가는 어릴 적부터 화려한 꽃의 선명한 자태보다 유독 시들어가는 식물에 집중했다고 한다. 마른 잎과 앙상한 가지들, 강아지풀과 갈대 등 본연의 색과 엽록소를 태우는 대신 갈변하며 생명을 잉태하는 점점 가벼워지는 식물들말이다. 한여름 화려했던 연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나서야 쑤욱 오르는 연밥을 관찰하며 작가는 무한한 영감을 얻고 본 작업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가 선택한 연밥 모티브들은 세포의 분열을 거치고 선순환의 원리를 기록하게 되는데 시들어가는 것의 소중함을 일찌감치 인식한 작가는 자연의 이치를 좀 더 다양한 차원의 회화적 실험으로 고찰하게 된다.

환, 별이 되다

그녀의 작가 노트를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2008년 즈음 하늘로 보낸 아들의 이야기는 어미라면 느낄 보편적인 슬픔이지만 필자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무기력한 인간이 나였음을 고백하고 그 상실감 속에서 힘겹게 붓을 들었을 작가의 정서에 크게 주목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눈물로 뚫린 가슴을 적셨을지. 예술가는 저마다의 히스토리를 품고 작업에 임한다. 어쩌면 그간 보인 작가의 작품은 나약하지만 삶에 대한 강한 존재감을 품어내며 오늘날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슬퍼하는가?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고 빛을 보내고 꿈을 보내고 별을 보낸다. 소중한 아들을 잃은 작가는 많은 번민과 침묵의 시간을 보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자신에게 방법론적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수없이 보냈을 것이다. 그 덕에 작품은 깊어졌고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은 사유적 요소로 강하게 각인되었다. 그녀의 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승화되었으며 관객에게는 리얼리티가 되어 가슴을 울린다.

삶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작품, 많은 이에게 위로 건네

아들을 잃은 고통 속에서 지내던 중 우연히 새하얀 시트에 묻은 생리혈을 보며 작가는 검붉은 고통으로 가득한 자신의 내면을 직면하였다고 표현한다. 이후 생리혈의 원형을 지키며 그것을 한지위에 조형적으로 풀어내는 시도를 하는데 이것은 여성의 은밀함을 과감하게 표출하는 예술적 행위이며 태로부터 생성된 원초적인 생명력을 품어내는 작업으로 보인다.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 그림을 선택한 작가는 여성의 생리혈이라는 솔직하고 대담한 매체를 사용하며 상실감을 치유하는 운명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 상실의 경계에서 이정여 작가가 만난 빛은 ‘반복적인 훈련과 집요한 집중의 작업’을 넘어서 작가 내면을 용기 있게 보여주는 행위였기에 이후의 작업은 좀 더 감각적인 순수성이 표현되고 있다. 슬픔을 비집고 만난 생명의 빛에 자신을 투영하고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하는 작가 이정여. 얇은 한지 위에 쌓인 그녀의 과거, 현재 미래는 절대 얇지 않다. 삶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그녀의 작품들은 이미 많은 이에게 큰 위로를 안기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상실을 경험하는 것, 그 경계에서 빛을 찾아 극복하는 것, 사색의 시간 속에서 삶이 깊어지는 것. 이것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선물이다. 그녀의 한옥갤러리 정원에는 소담스러운 식물들이 가득하다. 이제는 연밥뿐 아니라 작은 꽃 바람 돌 등 자연의 이미지를 단순한 조형으로 표현하며 생동감이 넘치는 작업을 쏟아내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상실의 경계에 선적이 있는가?

당신이 발견한 빛은 당신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