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양철지붕> 초연, 약자의 눈으로 우리 사회의 본질 그려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양철지붕> 초연, 약자의 눈으로 우리 사회의 본질 그려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2.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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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안효영, 어두운 인물군상에 인간의 온기 불어넣어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2월 17일(금) 저녁 7시반 마포아트센터에서 초연된 <양철지붕>은 약자의 눈으로 우리 사회의 본질을 그린 작품이다. 헤어날 길 없는 가난, 여성이기에 겪는 폭력, 게다가 언어장애의 굴레까지,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삶의 벼랑에 몰린 채 함바집을 운영하는 유현숙과 유지숙, 그리고 불규칙하게 날품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내들…. TV 뉴스에 안 나오는 이 암울한 인물 군상은 정릉 산동네 살던 시절 내 이웃의 모습이었다. <양철지붕>으로 우리는 ‘한국 리얼리즘 오페라의 대표작’을 갖게 됐다. 

모든 출연자들이 열연/열창했는데, 특히 유현숙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은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와 노래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구모영 지휘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자연스런 흐름과 생동감 있는 앙상블로 성악가들을 탄탄히 받쳐주었다. 양철지붕을 얽어놓은 심플한 무대는 집중도를 높였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적절히 가미하여 상황변화와 심리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제목 ‘양철지붕’에 대해 작가는 “쉽게 데워지고 금세 차가워지는 양철의 특성이 죄의식 없는 인간의 욕망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뜨거움과 차가움, 날카로움과 구겨짐이라는 상반된 특징을 갖고 있는 양철지붕 아래 세상에서 내던져진 인물들을 놓아두고자 했다”는 것이다. 

대본은 탄탄하다. 현숙이 살해한 새아버지, 전 동거남 구광모, 현 동거남 박기태는 처음에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폭력과 착취의 화신으로 돌변한다. 얼핏 보면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설정한 단순 이분법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약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 상황은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박기태가 조성호에게 백구 메리 이야기를 해 준 것도 인간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다. 메리는 자기를 구해 준 은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잡아먹히는 신세가 되는데, 인간의 운명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넌지시 풍자하는 것이다. 3막에서 세 차례의 반전이 연거푸 일어난 것도 간결하고 스피디해서 좋다. 

무엇보다, 현숙과 지숙 남매의 아픔과 고독이 시적으로 잘 승화돼 있다. “세상은 듣지 않아.” 탄식하면서도 스스로 억누른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유지숙의 모습은 슬프다. “살려달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도 나처럼 외롭고 두려웠을까”는 노랫말은 가슴에 사무친다. ”지겨워, 지겨워, 이 끝없는 두려움이. 지겨워, 지겨워, 이 끝없는 외로움이.“ 현숙과 지숙의 노래는 섬뜩한 리얼리티로 공감을 일으킨다. 작가 고재귀는 약자의 목소리를 시적인 언어로 대변했다. 관객들도 작가와 한마음이 되어 현숙과 지숙의 공포와 고독에 동참했다.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창작오페라 ’양철지붕’
▲창작오페라 ’양철지붕’ 공연 장면 (제공=오페라팩토리)

대본은 논쟁적이다. 새아버지를 죽인데 이어, 복수하러 온 이복 동생 조성호의 숨통을 끊는 현숙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팸플렛은 “복수는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하며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 내는가?” 질문하고 있었다. 이 관점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똑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건 옳지 않으며, “유현숙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는 가장 무서운 여자”라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유현숙의 죄를 묻는 게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모든 폭력을 똑같은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기력한 양비론에 불과하며, 부당한 폭력을 막기 위한 자구책으로서의 폭력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의 욕망이 되려고 태어나지 않았어. 더 이상 눈을 감고 봄이 오길 기다리지 않겠어. 봄이 오지 않는다면 그냥 내가 불이 되겠어. 불이 되어 얼어붙은 나를 안아주겠어.” 현숙의 독백, 그 진실성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대본이 논란의 소지를 남긴 것은 관객 스스로 생각할 여운을 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 

연출자 장서문은 이 극이 ‘차갑다’고 느낌을 밝혔다. 이 차가운 이야기에 인간의 온기와 따뜻한 연민을 불어넣은 것은 안효영의 음악이었다. 등장인물들은 그의 음악을 통해서 자기 목소리에 날개를 달았고, 연극 <양철지붕>은 뚜렷한 개성과 생명력을 지닌 오페라로 거듭났다.  

“인간이 자기보다 나약한 존재를 만났을 때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점점 심화되는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안효영은 파사칼리아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8마디 가량의 선율을 무한 반복하면서 인물과 상황의 모티브를 끊임없이 변주하는 기법을 구사했다. 다채로운 리듬과 선율은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유지했고, 목관과 금관과 타악기를 고르게 안배하여 색채감이 뚜렷했다. 금관의 고통스런 포효, 첼로 솔로의 몸부림 등이 인상적이었고, ‘결혼’ 얘기할 때 바그너 <결혼 행진곡> 모티브가 나오고 ‘부순다’는 대사에서 드럼 소리가 작렬하는 등 디테일을 세심하게 처리한 흔적이 보였다. 매혹적인 불협화음을 적절히 사용하여 시종일관 세련되고 감각적인 음악이 흐르도록 한 작곡자의 내공이 놀라웠다. 

▲창작오페라 ’양철지붕’ 공연 장면 (제공=오페라팩토리)
▲창작오페라 ’양철지붕’ 공연 장면 (제공=오페라팩토리)

안효영은 “세상은 듣지 않아” 대목을 작곡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놓았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오가는 이 대목은 오케스트라가 넉넉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에 깊은 감동이 있었다. 안효영은 <장총>과 <텃밭킬러>에서 다양한 음악적 전술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둔 바 있는데, <양철지붕>은 이보다 단순하고 대담한 기법으로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여 한층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드뷔시, 베르크, 메시앙 등 20세기 거장들의 오페라를 좀 더 쉽고 친숙하게 발전시킨 느낌이랄까,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은 음악이었다. 

전통 오페라에 익숙한 일부 관객들은 “아리아다운 아리아가 없는 게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흐름을 따라가며 음악에 몰입하는 재미는 이 불만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오케스트라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각 4명, 비올라와 첼로 각 3명, 콘트라베이스 1명, 플루트와 클라리넷과 호른 각 2명, 오보에와 바순과 트럼펫과 트럼본 각 1명, 팀파니 등 타악기 3명 등 모두 26명이었다. 정규 오케스트라 기준으로 보면 소규모지만, 상당수 연주자들이 솔로이스트의 기량을 발휘하니 ‘솔로들의 앙상블’로서는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생동하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소리의 향연은 풍요로웠다. 

언어장애를 가진 윤지숙이 2인 1역이라는 점은 공연 시작 전부터 관심을 끌었다. 배우가 무대에서 수어로 연기하고, 오케스트라 피트의 소프라노가 노래하여 ‘악기의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프라노의 음향은 무대 위에서 부르는 것과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약음기를 낀 것과 같은 신비스런 효과를 기대했는데 다소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무대 뒤에서 약간의 에코를 넣어서 노래하도록 하면 어떨지 궁금하다. 말 못하는 유지숙은 가장 나약한 존재다. 그녀의 노래를 ‘영혼의 노래’처럼 들리게 하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