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뷰] SeMA,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展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의 시선”
[현장리뷰] SeMA,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展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의 시선”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3.10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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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5.7까지
아이디어 스케치 없이, 재료를 느끼고 시작하는 작업
김윤신 작가 “힘닿는 데까지 한국에서 작업해보고파”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깎고 싶은 돌이 있고, 나무가 있어서 중년의 조각가 김윤신은 한국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고, 그 후엔 멕시코, 브라질 등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작가로서 새로운 재료를 만나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언제나 가득했고, 지금도 현역인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오는 5월 7일까지 개최하는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2022-4, 2022, 느티나무에 아크릴릭 ⓒ서울문화투데이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는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활동하고 있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을 조명하는 첫 국·공립미술관 개인전이다. 회고전이라고 하기엔 전시 공간의 이유로 출품 작품 수가 적지만, 회고전만큼의 깊이와 김윤신 작품 흐름을 볼 수 있는 전시다.

전시 개막전, 지난 달 열린 언론간담회에는 김윤신 조각가가 직접 참석해 작품에 대한 소개와 작품 활동 시절의 일화를 전했다. 전시 투어 중 작품 설명을 요청 받은 김 조각가는 작품 하나하나를 만지면서, 작품의 재료인 돌과 나무를 살아있는 존재처럼 대하며 이야기해나갔다. 재료가 된 나무와 작가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왜 그 돌을 택해서 작품을 만들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김 조각가의 모습에선 그 작품과 한 생을 함께 살아온 사랑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번 전시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김윤신의 작업 세계를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의 작품 철학에 집중해 구성했다. 석판화, 석조각, 목조각, 한국에서의 최근작 등 4개의 섹션으로 나눠 작품 총 70여 점을 통해 소개한다. 또한, 육체를 사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전통적 조각기법을 구현하는 1세대 원로 조각가를 선보이면서 현 시대에 육체적이고 자연적인 감각을 일깨우고자 한다.

전시를 준비한 방 학예사는 동시대의 조각기법, 예를 들어 미디어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거나 팀을 구성해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들이 등장한 현 시대에, 전통적 조각기법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 조각과 현대 조각 중 무엇이 더 우월하거나 낫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짚으며, 조각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구축하고자 했음을 강조했다.

▲대형회화작품 <내 영혼의 노래>와 김윤신 조각가 ⓒ서울문화투데이

한국 1세대 여성조각가 ‘김윤신’

김윤신은 1935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해방, 6.25전쟁 등 20세기 한반도의 대격변을 경험했고 이는 김윤신에게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 계기가 됐다. 김윤신은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5년 뒤인 196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조각과에 진학했다.

김 조각가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서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1974년 선배 작가들과 함께 한국여류조각가회 설립을 주도하는 등 1970년부터 한국 조각계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펼쳤다. 김 조각가는 “프랑스 유학 시절 파리의 여성 조각가들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한 걸 보면서 한국 여성조각가가 활동하고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라며 당시를 설명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김 조각가는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고, 후엔 아르헨티나를 거점으로 다수의 해외 전시에 참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여성 작가로서 활동하기 힘들었던 시기, 해외로 나가 황무지와 같은 타국에서 정착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 작가는 “어린시절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 산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해졌다. 살아서 이 땅 위에서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 남기고 싶었다”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고자 한 저력의 근원을 설명했다.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전시 「3.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 전경 ⓒ서울문화투데이

조각을 통해 이루고자 한 바가 있었던 김 조각가는 대학졸업 후 하나 뿐인 오빠에게 유학의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자 오빠는 “네가 유학을 떠난다면, 결혼은 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 살 인생을 대비하고, 후에 나이가 들어서 조카들에게 신세를 지려하지 마라. 그리고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나올 수 있다했으니 어디를 가서든지, 죽기살기로 열심히 해라”라고 세 가지 약속을 요청했다고 한다. 김윤신은 이 약속들을 지키겠다고 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그의 작품 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김 조각가는 기자와 유학과 이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라버니였는데, 당시 독립운동도 하신 분이었고 항상 굳세고 바른 정신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도 그런 정신을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라는 얘기를 전하기도 했다.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전시 「4. 노래하는 나무」 전시 전경, 김윤신 조각가가 2021년, 2022년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이 전시됐다. ⓒ서울문화투데이

2023년은 김 조각가가 88세가 되는 해다. 간담회에 참석한 김 조각가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 김 조각가는 현재도 왕성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SeMA에서 의뢰한 신작도 공개되고, 코로나 시기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2022-4>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느티나무에 아크릴 색을 입히면서,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과 대화를 나눴던 때를 떠올리며 완성된 작품이다.

간담회 끝에 김 조각가는 거의 10여년 만에 찾은 한국에 대해서 생경한 감각을 전했다. 김 조각가는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 오니까 모든 것이 정말 빨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에서 젊은이들의 활력이 느껴졌다. 지금은 한국에 완전히 귀국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 한국에서 더 좋은 작품을 많이 해놓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 작업을 하면서 한국의 나무를 접하게 됐다. 내가 몇 십년간 만져왔던 아르헨티나의 단단한 나무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한국의 나무는 아르헨티나 쪽 나무보다 연해서 전기톱이 쑤욱 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새로운 감각이었고, 나무도 이렇게 다른데 사람은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늙은이도 쉽게 만질 수 있는 나무여서 내 생각을 많이 펼쳐보고 싶다”라며 여전히 뜨거운 작품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김윤신, 예감, 1967, 판화지에 석판화, 63.3×45cm (사진=SeMA 제공)
▲김윤신, 예감, 1967, 판화지에 석판화, 63.3×45cm (사진=SeMA 제공)

석판화에서 시작해 나아간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김윤신은 197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작품세계를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해 나갔다. 김윤신의 '합'과 '분'은 세상 만물과 우주를 설명하는 근본으로서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출발한다.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서로 다른 둘이 만나(합이)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가 되며(합일), 그 합이 다시 둘로 나뉘어(분이) 각각 또 다른 하나가 된다(분일)는 것이다. 작가는 조각의 과정 또한 나무에 자신의 정신을 더하고(합), 공간을 나누어가며(분) 온전한 하나(예술작품)가 되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철학에 대해서 김 조각가는 만물의 근본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전시는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김윤신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1. 예감」에서는 김윤신이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유학 시절(1964~1969년) 제작한 석판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작가의 조형 세계를 예감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2. 우주의 시간」에서는 김윤신이 생애 전반에 걸쳐 작업을 계속한 목조각에 비해 한정된 기간 제작됐지만 가장 힘든 과정을 동반했던 석조각을 소개한다. 김윤신은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멕시코 테칼리(Tecali) 마을에서 오닉스(Onyx) 조각을, 2001년에서 2002년까지는 브라질의 솔레다데(Soledade)에 머물며 준보석을 재료로 한 석조각을 탐구한다.

김 조각가는 이 공간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품 중 오닉스를 소재로 한<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91-418>을 애정이 있는 작품으로 꼽았다. 김 조각가는 “오닉스라는 소재는 겉에서는 속의 모습을 절대 알 수 없다. 돌을 자르고 단면을 물로 정돈해야지만 그 모습을 할 수 있다. 마치 지구의 축약본과 같았고, 우주의 시간과 우주적 힘의 질서를 느낄 수 있는 소재였다”라며 재료에 매료된 계기를 말했다.

▲오닉스를 소재로 한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91-418>을 설명하는 김윤신 조각가 ⓒ서울문화투데이

「3. 더하고 나누며, 하나」에서는 김윤신이 한평생 주력해온 목조각을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아울러 소개하며 40여 년에 걸친 작품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공간에서는 한국의 나무와 아르헨티나의 나무인 ‘알가로보 나무’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 만나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국가의 나무가 한 작가의 손 안에서 작품으로 제작된 모습은 통하면서, 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이 공간에서는 김윤신이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 직후 제작한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84-84>이 있는데, 이 작품은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의 나무를 재료로 만들어졌다. 김 조각가는 “당시 아르헨티나 현대미술관에서 작품을 의뢰받았는데, 재료를 구할 곳이 없어서 이곳저곳 물어 물어서 구한 나무다. 나와 함께 비도 많이 맞고, 고단하면 고단했다고 할 수 있는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라며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이 작품은 형태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 김윤신이 한국에서 선보인 수직적 형태의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연장선에 있지만, 나무의 잘린 단면과 대조되는 껍질의 질감이 이국적인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4. 노래하는 나무」에서는 2022년 이후 김윤신이 한국에 머물면서 제작한 최근의 목조각과 2013년 아르헨티나에서 그린 대형 회화 한 점을 선보인다. 3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대형 회화 작품 <내 영혼의 노래>는 김윤신이 느끼고 감탄한 아르헨티나 대지에 대한 느낌이 담겨있다. 옆으로 긴 화면과 화면 가운데에 자리한 나무 기둥, 그리고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와 선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지가 지닌 이러한 생명력을 표현한다.

▲(좌측)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84-84, 1984, 미상의 나무 (아르헨티나 나무로 처음 작업한 조각), (우측)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79, 1979, 소나무 (한국에서 제작한 조각) ⓒ서울문화투데이

이외에 또 특별한 작품으로는, 야외에 설치된 조각 <노래하는 나무>가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알루미늄 채색 야외 조각으로, 화려한 색감을 가진 조각은 관람객들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듯 하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하는 김윤신의 열정도 찾아볼 수 있다.

전시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는 대한제국 시절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된 건물을 활용한 남서울 미술관에서 펼쳐진다.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이국적이기도 한 김윤신의 목조각이 전시공간과도 풍부한 시너지를 이뤄낸다. 전시는 김윤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뿐 만 아니라, 아카이브 공간을 통해 195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사진, 메모, 전시회 브로셔 등의 자료를 선보인다. 이는 김윤신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조각사에도 의미 있는 자료다.

김윤신의 조각에선 하늘에 염원하듯 돌을 쌓아올린 형태, 날개의 형상ㆍ십자가를 연상시키는 T자 형태, 조각 내에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서 위태롭지만 안정적인 형상을 드러내는 형태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한옥의 처마, 저고리 소매의 곡선을 연상케도 하고 하늘을 향한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

1층부터 2층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김윤신이라는 조각가를 알아갈 수 있는 편안한 대화와도 같다. 김윤신은 작품을 하기 전 스케치를 따로 하지 않고, 그저 며칠을 두고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의 생김새, 나무의 껍질과 속살의 차이, 나무의 결 혹은 향기까지 느끼며 작업을 시작한다. 전시에선 그 과정 속 탄생한 마지막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지만, 작품을 마주했을 때 관람객은 김윤신의 시간도 함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