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연극인 박팔영 “나는 매일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닦는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연극인 박팔영 “나는 매일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닦는다”
  •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김재성 사진기자
  • 승인 2023.03.1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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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ㆍ영화ㆍ드라마ㆍ미술ㆍ분장 등 전방위 예술가
‘생활연극’ 활성화 앞장…“연극 활성화 돕는 일상의 움직임”
‘충남 금산’ 지역 특색 살린 창작 연극·뮤지컬 개발 나서
“연극, 시대 유행 좇지 않는 영원한 수작업 돼야”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김재성 사진기자] 대학로의 수많은 연극 포스터들이 붙은 연극 게시판의 한 가운데에는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다.’라는 문장이 자리하고 있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햄릿>을 통해 연극을 ‘시대의 거울이자, 삶의 모방이며, 진실의 표상’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연극 대신 스마트폰에 얼굴을 비춰본다. 발 빠른 시대에 연극은 트렌드에 뒤쳐진 예술이 됐다. 이제 관객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당장 눈 앞에 펼쳐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다시 시대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연극인 박팔영 ⓒ김재성 사진기자
▲연극인 박팔영 ⓒ김재성 사진기자

40여 년 간 거울을 닦으며 연극계에 몸담아온 박팔영은 배우에 희곡작가, 분장사, 연출가 그리고 본래의 전공인 동양화가(수묵화)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가진 재능을 세상 구석구석 퍼뜨리는 예술가이다. 1979년 연극계에 입문하면서부터 현재까지 작업한 작품 수만 영화 36편, 출연 연극 130여 편, TV 장/단편 출연 드라마 1천여 회 이상, 연극 연출 3, 40여 편, 희곡 10여 편에 이르며, 분장사로서 담당한 영화ㆍ연극 분장 작품은 연간 30여 편에 달한다.

전국을 돌며 연극, 뮤지컬 등 공연예술의 대본과 연출, 제작까지 도맡아 하는 박팔영이 놓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후배 배우들을 견인하는 일이다. 지역 불문 부르는 곳이 많은 그는 작품을 만들며 신인급 배우를 지켜본 뒤 중앙 무대에 세우고 있다. 2004년 그가 희곡ㆍ연출ㆍ제작을 도맡은 <명동 블루스> 무대에 섰던 배우 김무열, 부산 지역 연극 단역배우 활동 당시 <맥베스>에서 만난 박칼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전공 분야인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미술 작가로는 각종 미술대전에서 수상작품을 내면서 화가로 적을 두고 개인전과 그룹 단체전에 작품 발표도 꾸준히 해왔다. 그가 살면서 만나게 된 연극인과 지인들을 먹으로 그린 얼굴 크로키 작품만 해도 2,000여 명 가까이 된다. 이것을 활용해 콜라주와 드로잉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재능은 분장으로도 발현된다. 배역에 따라 배우를 천의 얼굴로 변신시키는 분장사는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창의성과 예술성이 동시에 요구되지만, 수입이 적어 제대로 교육받는 후배들이 적은 탓에 그는 아직도 전국을 돌며 분장사로서도 바쁘게 살고 있다.

▲연극인 박팔영은 작품 활동을 하며 만난 동료들을 추억이 담긴 기록으로 남기고자 그리기 시작했고, 작품들은 어느새 전시를 할 정도로 모였다.

한편, 그는 제19회 대한민국연극제 특수부분 분장상(1990), 연극영화의해 사랑의 연극잔치 최우수분장상(1991), 자랑스런 금산인상(1997), 한국연극배우협회 공로상(2002), 한국연극배우협회 배우상(2013),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2013), 대한민국환경문화대상 연극연출상(2014), 한국생활연극 분장상(2018), 대한민국정수미술대전 장려상(2019), 대한민국현대조형미술대전 특선(2019), 한국연출가협회 공로상(2019), 한국생활연극대상 희곡상(2021) 등 오랜 기간 다양한 방면으로 그 열정과 실력을 고루 인정받으며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이다. 

박팔영은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프로 배우들의 활동 무대 외에,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생활 연극’ 활성화와 아마추어 배우들의 무대를 위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생활연극’이 무대에 서고 싶은 일반인들이 꿈을 이뤄줌과 동시에, 전문 연극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연극의 외연과 연극 인구 저변 확대를 돕는 일상의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어린 시절 나고 자란 충남 금산을 알리고 문화ㆍ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금산의 역사를 담은 연극과 뮤지컬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가 대체할 수 없는 연극만의 실재하는 호흡으로 관객들과 다시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관객들이 언제든 다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도록, 매일 자신만의 방식으로 거울을 빛내는 연극인 박팔영을 만나, 그의 삶이 담긴 연극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상한 연극인 박팔영(가운데)이 이은영 발행인(왼쪽),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오른쪽)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14회 문화대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현장에서 전하지 못했던 소회를 전한다면?

연기상, 연출상, 분장상, 희곡상 등 연극계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고루 받아봤다. 그런데 사실 연극 외의 분야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를 아우르는 시상식이라는 정도로만 알았는데, 현장에 가보니 심사위원부터 시상자, 수상자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분들이라 놀라기도 했다. 그곳에서 함께 상을 받는 것 자체로 영광스러웠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른 분야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지금의 작은 관심이 모여 무대 위에서 예술로 펼쳐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배우, 분장사, 희곡작가, 연출가, 동양화가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

음악을 좋아하고, 그것보다 영화를 좀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1960년대 초, 금산 읍내에서 친구분들과 함께 중앙극장을 운영하셨다.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영화배우의 꿈을 키우게 됐다.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 엄하셨던 데다 교육열이 굉장히 높으셨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꿈은 입 밖으로 절대 낼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자식 교육을 생각한 아버지의 결정으로 금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 전부 서울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법대를 가라고 하셨지만, 정작 나는 시골에서 1등을 하던 성적이 서울로 오면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중학교 입시시험이 있던 시절, 서울 금호동에 있던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점차 적응을 하면서 성적도 원래 궤도로 돌아왔다. 

배우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홍익대 미술대학원 동양화 전공이다. 다수의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며 배우뿐만 아니라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나?

고등학교는 성적에 맞춰 소위 말하는 명문 고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계열 고교인 학교장의 간곡한 진학 권유에 아버지가 설득되셨고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상고에 가게 됐다. 상고는 주산 교육이 중요했는데 나는 그 시간이 가장 싫었다. 다른 친구들이 주산에 매달릴 때, 나는 미술에 빠졌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물론 그림도 아버지 몰래 그릴 수밖에 없었다. 

공책이나 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다, 학교 미술 선생님의 눈에 띄어 방과 후에 남아 지도를 받았다. 당시 예체능은 예비고사가 따로 없었기에, 실기로 H대 서양화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을 못했다. 유신반대 운동 등 이슈에 휩쓸려 다니느라 정작 학교 수업은 제대로 못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같은 처지의 학생들과 단체로 입대를 하게 됐다. 

▲연극인 박팔영 ⓒ김재성 사진기자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그 시절 연극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었음에도 극단 활동을 이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연극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제대 후의 일이다. 1979년 초 동아일보에서 ‘한국배우전문학원’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입학했다. 김인걸 원장이 설립해 대학 영화연극학과의 원조 교육기관으로 길을 열었으나, 그 무렵 대학에 전공학과가 사회적으로 인식을 달리하고 발전해 가면서 내가 문 닫기 전 마지막 수업을 받은 학생이다. 이후 연극 <맹진사댁 경사>로 연극에 입문했다. 극단 ‘대하’ 소속 배우로 활동했지만, 연극배우로 먹고살기가 힘들어 부업으로 미술학원을 겸한 화실을 운영했다. 수입으로 보면 부업이 본업이었던 셈이다. 낮에는 연극하고, 밤에는 그림 그리는 생활을 6년간 병행했다. 

연극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몸은 힘들어도 무대에 계속 설 수만 있다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화실을 운영하면서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원래 직업은 화가고 연극은 취미로 한다는 인식이 박히니, 동료로 인정받기도 어려웠다. 어느날 갑작스레 화실 문을 잠그고 3년 간 발길을 끊었다. 하루아침에 생계를 고민하게 되는 처지에 놓였지만, 비로소 연극인으로 인정받게 됐다는 기쁨이 더 컸던 것 같다. 연극이 내게 가져다 준 것은 정말 많지만, 관객과의 교감을 통한 성취감과 카타르시스가 가장 크게 다가왔고 계속 무대에 서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는 재주가 본업인 무대예술에도 영향을 미치며 분장사 박팔영으로도 통하고 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분장의 영역은 회화와 다르기 때문에 따로 배우는 과정이 필요했을 텐데 분장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199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다. TV 드라마 역시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키며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고 자연스레 관련 인력들이 방송국으로 이동하게 됐다. 공연예술 분장계에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에 배우들은 스스로 분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분장은 메이크업과 다른 영역이다. 극 중 인물의 신분, 나이, 성격 등을 모두 담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현 방식이다. 분장 능력과 더불어 창의성, 예술성이 함께 요구되지만 시장의 한계 등으로 돈벌이가 안 되다 보니 인력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리는 능력은 있었지만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할리우드에 있는 죠 브레스코 인스티튜드(Joe Blasco institute)에서 제대로 분장을 배웠다.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분장 일을 시작하니, 이 일로도 생계유지가 되더라. 내가 분장한 작품들이 점점 입소문이 나고 알려지니 제자들이 생기고, 분장팀을 꾸릴 수 있게 되고, 사무실을 갖게 됐다. 

배우, 분장사뿐만 아니라 극단을 꾸리고 작품을 제작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분장 공부를 하러 미국에 가있는 동안 공연 제작에 대한 구상을 계속했고, 실현하기 위해 극단 공연예술 창작실험실을 창단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귀여운 여인>을 연극 <부킹> 무대로 올려 나름대로 흥행을 거뒀다. 당시 1억 원이 넘는 수익을 냈으니 성공이라 부를 만한 성적이 아닌가. 하지만 이후 IMF로 인한 타격을 공연장도 피할 수 없었고, 나도 다시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처럼 빈손이 됐다. 그러다가 1997년 경북 구미로 이사를 가게 됐다.

처가가 구미에 있다. 여러 사정으로 택한 구미행이긴 하지만, 많은 고려 사항 중에는 아이의 교육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곳에서만 쌓을 수 있는 정서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구미에서 연극을 당분간 쉬면서 아이를 위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내려가니 찾는 곳이 많아 일을 계속 했다. 배우, 대본, 연출, 분장을 아우를 수 있으니,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지방 극단에서는 내가 반가웠을 것이다.(웃음) 구미를 비롯해 대구, 포항 등 경북 지역에서 작품 기획부터 연출까지 도맡았다. 많은 작품을 하게되었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문제적 인간 연산> 등이 당시 작업한 작품들이다.

▲1989년 연극 ‘밤주막’ 출연 배우의 분장을 하고 있는 박팔영
▲1989년 연극 ‘밤주막’ 출연 배우의 분장을 하고 있는 박팔영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프로 배우들의 활동 무대 외에,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생활 연극’ 활성화와 아마추어 배우들의 무대를 위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데, 이를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생활연극’은 프로 연극인들이 지도하고 협동 작업을 함으로써 배우가 되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은 일반인들이 꿈을 이뤄주는 숭고한 일이다. 나아가 생활 연극인들의 무대를 통해 전문 연극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연극의 외연과 연극 인구 저변 확대를 돕는 일상의 움직임이다. 

충청남도 금산에서의 생활연극 활성화, 나아가 지역 특색을 살린 창작 작품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오게 됐지만, 언제나 마음속엔 내 고향 금산이 있었다. 이후 2001년 부모님의 귀향으로 금산을 자주 찾게 되며 금산을 지금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됐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엔 그곳이 나의 작업실이 됐다. 흔히 ‘금산’이라 하면 특산품인 인삼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나는 이 점이 너무 안타깝다. 금산은 칠백의총, 강처사 등 다양한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알리는 동시에 이야기를 들으러 전국에서 금산을 찾게 만들고 싶다. 연극과 뮤지컬은 금산을 문화와 관광의 고장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최적의 콘텐츠라고 생각했고, 이를 큰 무대에 올리기 위해 대본 작업과 생활 연극인들의 배우 훈련을 통하여 꾸준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연극인 박팔영 ⓒ김재성 사진기자
▲연극인 박팔영 ⓒ김재성 사진기자

오랜 시간 현장에 몸담으며 지켜봐온 입장에서, 연극계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개선되어야 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대학로의 수많은 연극 포스터들이 붙은 연극 게시판의 한 가운데에는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다.’라는 문장이 자리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연극을 ‘시대의 거울이자, 삶의 모방이며, 진실의 표상’이라 말했다. 이는 비단 연극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공연예술 작품은 시대를 반영해 미래를 상상하는 선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무대에 오르는 작품들 가운데 이를 담고 있는 것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더 냉정히 말하자면 지금 대학로에 올라오는 작품 가운데 관객에게 돈을 받고 팔아도 되는 연극이 몇 개나 될까 고민해보게 된다. 기술의 발전으로 무대 위의 작업들도 점차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하게 되지만, 연극만큼은 유행을 좇지 않고 영원한 수작업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름 앞에 굉장히 많은 수식어가 따르는데, 스스로를 뭐라고 소개하고 싶은가?

나는 그냥 나를 ‘연극쟁이’라고 말한다. 사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은 감사하면서도,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배우, 분장, 연출, 희곡, 그림 이 모든 걸 합치면 연극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방면으로 쉴 새 없이 도전했던 것도, 연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열망이 나를 이끈 것이다. 앞으로 뜨겁게 열망하며 연극을 사랑할 것이다. 

앞으로의 목표 혹은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작업이 있는지?

20대 때 처음 연기를 시작해서 70대가 된 지금까지, 감사하게도 수많은 작품을 통해 많은 인물을 연기했지만 나를 대표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어떤 작품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배우로서 정점을 찍는 작품을 죽기 전에 하나쯤 만나보고 싶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림 전시. 먹물로 그리는 단선 초상화를 그리며 2011년부터 20여 차례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다. 나는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그림의 주인공은 나와 함께 연기했던 동료 배우, 스태프들이고 그림의 배경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이다. 순전히 나의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이것이 넓게 보면 연극계가 걸어온 길이라며, 동시대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더라.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내가 그림으로 기록한 우리나라 연극계의 발자취가 내 손 안에서 머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시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면 한다. 국립극장이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등 연극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공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