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평론계의 태동기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평론계의 태동기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3.03.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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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참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억들이 새롭다. 내가 운 좋게 독일 정부장학금( DAAD)을 받고 당시 서독 튀빙1엔(Tübingen)과 뮌헨(München) 대학에서 독일문학전공에 철학과 미술사를 부전공으로 공부했다.ㆍ문학에 나타난 시대정신>으로 석사과정을 끝내고 <독일 표현주의 연극에 나타난 현대성 -서사극이론을 중심으로 ->라는 제목으로 박사과정을 거진 마무리 할 때쯤 나는 독일 튀빙겐 대학에 신설된 한국어과의 최초의 한국어 강사로 체용 되었다. 덕분에 독일에 세금을 내며 당당한 납세자가 되었다.

다행이 나는 한국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 청원하여 한국책 7,000 여권을 기증받아 튀빙겐 대학 아세아 언어학과에 기증하여 한국어과의 면목을 살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독일 사회에 비친 한국이란 나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 '전쟁고아가 많은 나라', '아시아 어느 한구석에 박힌 아주 가난한 작은 나라'라는 것 외에 모르는 미지의 나라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처음에는 중국과 몽골국을 전공하려는 학생 2, 3명에 불과했으나 1963년 말 한국 간호사가 독일에 오면서는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수는 매 학기 12명에서 15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한국어과는 중국어과와 일본어과를 제치고 제법 활발하고 흥미로운 언어학과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튀빙겐대학의 한국학과는 언어의 범주를 넘어 정치 경제 문화를 다루며 베를린과 보쿰대학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한국학과가 되어있다.

독일대학의 변화를 언급함으로써 나는 1967년 봄 독일 정부 장학재단 DAAD가 지원해준 여비로 프랑스, 그리스, 인도, 태국, 대만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세계는 넓고 세계의 문화는 지극히 다양하다는 것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독일 유학을 떠날 때, 독일정부가 예산이 부족하여 독일로 오는 비행기값을 내 돈으로 지불하고 오라한 데 대한 미안함을 독일은 내게 이렇게 갚았다. 박사과정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러 올 때에도 새 여비를 대준다는 조건으로 내게 왕복티켓을 끊어 준 상태였다. 나는 독일정부의 정직함과 약속을 지키는 정신에 오늘날까지도 감복한다.

한국 문화계, 특히 공연예술계의 평론의 바탕이 이루어지던 70년대 초중반의 한국공연예술계의 태동기를 논하기에 앞서 긴 전주곡을 연주하듯 나의 독일유학 시기를 논한 이유는 내가 귀국해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태(1973)>와 <관객모독(1976)>등 연극 열정과 관심 촉발

 

당시엔 한국의 문화계, 특히 공연예술계와 미술계가 1953년 정전을 선포한 후, 근 20년이 되오는 어수선한 시간을 지나오면서 한국의 문화계가 차츰 숨을 돌리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옛 시대의 골동품가계가 터를 잡고 있던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국 민화를 팔던 자리에는 한국화가들의 전시회와 한국 창작 청자의 모습이 나타났고, 가끔 창작 조각전시회까지도 눈길을 끌며 한국 문화계의 숨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 사람들의 활기찬 눈과 귀를 일깨우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70년대 초 중반에 대중으로까지 확산된 연극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품 <태 (1973)>와 <관객모독 (1976)> 등은 특히 젊은 층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촉발시켰다. 아울러 무용과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모으며 문화의 불모지였던 한국사회, 서울의 중심에만 쏠려있던 한국의 문화계에 소리 없이 대중의 관심을 높이며 인사동과 남산에 있는 동랑레퍼토리 극장 중심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 후 대학로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자리 잡고 지금의 아르코 대극장과 소극장이 들어서면서 동숭동과 대학로가 연극과 무용이 중심이 되는 공연예술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국립극장과 동랑레퍼토리 극장과 축을 이루며, 6.25 전쟁으로 인한 문화 암흑기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문화의 활력으로 불러 모으기 시작한다. 그 후 나는 비록 교수월급으로는 좀 벅찬 가격이었지만 지식산업사의 화집 등을 모조리 사모으며 한국의 정신이 무엇인가에 몰두했다. 아울러 인사동 거리의 즐비하게 대접받지 못한 채 늘어놓은 고가구와 고려자기, 백자 등에 골몰하였다.

하지만 나 개인적인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초에 걸쳐 한국문화의 자존심을 일깨워준 『조선시대의 화집(』 지식산업사. 김경희사장)이라는 품격있는 출판물 때문이었다. 화집에 실린 조선시대 화가들의 품격있으면서도 운치와 자유로움이 넘치는 그림을 보며 한국전통문화에 매료되었다. 특히 화가 청전 이상범의 전시회에서 받은 감명과 화집을 나는 보물처럼 간직하며, 우리 문화 속에 서려있는 고매함과 자유로움의 근원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찾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