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와 사회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재일동포 역사학자 정조묘 교수의 죽음
우리 정부와 사회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재일동포 역사학자 정조묘 교수의 죽음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본지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10.02.0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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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교수의 일본속보]

2010년, 한일강제병합의 불행한 역사로부터 100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여 일본과의 근대사 진상규명 및 그 내용의 공유, 청산되지 않고 은폐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전환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1월 31일에 와세다 대학교에서 한일 양국의 시민 및 단체 대표들 약 250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과거를 청산하고 평화의 미래로--]라는 집회에는 근대사 관계자들이 모여, [작년의 총선거에서 성립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3당 연합 정권과 더불어 한국 병합 조약의 진실에 입각하여 과거 청산을 행하고, 힘을 합쳐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자]는 일본 실행위원회 이토 나루히코씨의 인사와 더불어 이 역사적 시기를 어떻게든 협력하여 청산의 시기로 만들어 양국민의 화해로 이끌자는 각오의 모임이 있었다 (필자에게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준 일본 도서신문의 다치하라 기획부장께 감사를 표한다).

같은 날, 도쿄 각지에서는 한반도 역사 관련의 귀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가쿠슈인대학교가 개학 60주년 기념으로, [지식은 동아시아의 바다를 건넜다]는 제목 하에 각종 강좌 및 소중한 문헌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개최했다(초청문을 보내준 동양문화연구소측에 사의를 표한다).

이 불행한 역사로 인해 너무나도 힘들었던 100년의 시간을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만 우리의 내일이 있고, 올바른 역사적 관계의 시작이 가능하기에 모두 동아시아의 지역에서 공생하기 위한 미래 지향적 역사문제 해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희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고 정조묘 교수

그러한 노력과 각종 한일 언론들의 한일병탄 특집이 쏟아져 나오며 역사 규명과 청산에의 적극적 자세가 보이는 2월4일, 필자는 같은 한일관계사를 가르치는 전우이자 공동 연구자이고, 얽혀진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의 한일 관계론 해석과 더불어 재일 동포의 사회적 위치와 인권 향상에 몸바쳐 왔던 오오타니대학의 정조묘(鄭早苗)교수가 안타깝게도 타계를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작년 6월의 나라교육대학에서 열렸던 백제문화 심포지움에 일부러 필자를 찾아와서 과로하면 일찍 쓰러진다며 되려 어깨를 만져주었던 그녀였다. 그 뒤, 의기투합하여 재일동포 관련사를 같이 정리하자며 공동연구를 시작했고, 작년 9월 도쿄시내에서 모임에서는, 올 해 3월이면 정년 퇴임을 하기에 재일 동포의 불공평한 연금문제와 더불어 노후를 걱정하기도 했던 분이다.

오사카 국제이해 교육연구센터 이사장을 겸하며 일본의 다양한 사회문제와 동포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몸은 돌 볼 시간도 없이, 오직 사회적 부조리를 하나하나씩 빨리 풀어나가야만 한다던 정조묘 교수는 어릴 때부터 재일 동포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많은 고생을 해 온 동포 사회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필자는 조금이라도 느꼈던걸까? 다가오는 신학기부터 사용할 교사자격증 필수과목인 국제인권수업의 책을 집필 중에 바쁜 그녀에게 [재일동포와 일본사회]에 대한 원고를 의뢰했다. 그렇게 쫓기면서도 쾌히 승낙을 했고, 우정어린 원고를 받았으나 그 원고가 그녀의 유고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기에 필자의 슬픔은 지금 남다르다. 이미 원고를 송고한 직후의 그녀의 몸에는 암세포의 전이로 재기 불가능하였음을 얼마전에 듣고서는 가슴이 미어졌다.

▲필자 이수경 교수

필자 역시 제대로 숨 쉴 틈없이 일에 쫓기는 터라, 여유를 찾아서 오사카에 병문안을 가려던 참에 들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더더구나 공동연구를 계속 추진중인 상황이기에 그녀를 잃은 필자로서는 오른팔을 잃은 기분에 어떻게 추스려야 할지 마음이 무겁다. 게다가, 병마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필자에게 연구 완성을 부탁했다는 그녀의 사회적 사명감 땜에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없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더더욱 가슴이 시려온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 교수가 타계하자 일본 전국의 모든 언론들이 그 부음 소식을 전하며 그녀의 한국 역사의 정립에 대한 공헌과 재일동포 지위 문제와 인권 향상에 대한 헌신적 삶을 평가하였으나, 정작 우리 사회는 그 뉴스에 무관심 하였고, 그녀의 존재 조차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제 말기에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상상을 초월하는 쓰라린 [조선인] 차별을 받으면서도 한반도 역사를 기초부터 연구하여 한국 역사 알리기와 재일 동포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아왔던 그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고, 재일 교포들의 위치도 달라졌건만, 우리 정부는 물론 사회가 너무 그녀의 존재를 모른다는게 가슴 아프다.

언론에 나서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역사연구와 사회 문제 해결에 여념이 없었던 그녀가 비록 한국 사회에 알려지는 기회가 없었을지언정, 그녀의 평생에는 항상 [한국]이라는 조국과 태어난 [일본 사회]와 [재일교포]라는 트라이앵글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천명으로 살다 간 시대의 학자였다.

▲고 정조묘 교수의 부음과 그의 업적을 추모하는 일본 언론들의 뉴스.
일본 사회가 그런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수 많은 언론이 일제히 그녀의 타계를 보도해 준 것은 그나마 정직했던 정교수의 겸허하며 쉬지않는 노력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평생을 한국 바로 알리기위해 꾸준한 연구로 설득력있는 호소를 해 왔고, 재일 동포의 오늘을 위해 헌신해 온 정 교수의 일생을 이제는 널리 알리고,늦은 감은 있지만 끝까지 자신보다 사회를 걱정한 우리의 동포 사학자 정조묘 교수의 고고한 정신을 기리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화려한 삶을 멀리하고 청렴결백을 고집하며 한일 관계의 기반 구축에 여념이 없었기에, 자신을 내 세우기보다 산처럼 쌓이는 일에 쫓겨 지독히도 일만 하다 쓰러진 삶이었다. 본인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퍼졌던 암세포와 싸울 여력도 없이 갑자기 떠나간 그녀지만, 죽음으로밖에 쉬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은 처절한 삶이 되었지만, 부디 그녀의 영혼만이라도 저 세상에서는 남들처럼 좀 편안히 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상대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이해하던 정 교수의 재일동포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해 노심초사하던 마음과, 한일 역사 문제를 같이 고민하던 자세를 기리며, 필자가 집필 중인 인권책에 송고된 그녀의 원고 중에서 재일 동포의 [무연금 문제]를 발췌하여 소개해 두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그녀 자신이 힘겹게 겪어온 재일 동포 사회를 이해하고, 그녀가 버겁게 버텨온 사회 문제의 일부라도 바꿔보려고 노력해 온 고투를 우리 독자들과 함께 새길 수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

65년간 그 여린 몸으로 차디찬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속의 차별과 싸우며 자신을 잊고 버텨온 그녀의 삶이 있었기에 재일 동포들의 권리 향상도, 한일 역사관계의 기반 구축도 가능했음을 우리 정부와 사회는 물론, 많은 동포들도 잊지 말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정 교수 기고 내용 일부 인용, 번역은 필자…………………….

무연금(無年金)문제는 1959년에 제도화 된 국민연금법의 국적조항을 위하여 재일 외국인이 배제된 문제이다. 후생연금에는 국적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원 등은 연금 가입이 가능했지만, 최근까지 재일 외국인에 대한 취직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연금 수급연령의 재일 외국인 수급자는 많지 않다. 그 결과, 많은 재일 외국인 무연금자가 존재하고 있다. 1968년의 오가사하라제도(小笠原諸島) 반환, 1972년의 오키나와 반환때는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했던 사람에 대해서 경과 조치를 두고 구제를 했지만 구 식민지 출신자들에게는 일체 적용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른다. 이 문제는 복잡한 구조로 얽혀 있기에 위와 같이 간단한 설명을 관대하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장애연금도 복잡하지만 간단히 설명해 두겠다.

1982년부터 시작된「내외인 평등」을 골자로 하는 난민조약에 의해 재일 외국인도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0세를 넘은 장애자, 60세 이상의 고령자는 적용외라고 하여 버림받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재일 동포는 1세들이 몇 퍼센트 정도밖에 안되고, 재일 동포 2세 이하가 대부분이기에 압도적으로 대다수가 일본 밖에 모르는 재일 외국인이다. 그러나 국적에 의한 배제 상태는 계속되는 상황이다.

끝으로 재일 동포 4세의 교육권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2009년 7월 말일의 오사카 고등재판소의 판결이다. 교토시의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재일 동포 4세인 A군에 대해서 재학 중인 학교는 퇴학 처분을 했다. 그 퇴학 처분에 대한 불복종의 재판이었다.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퇴학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A군은 재일 외국인이므로 일본의 의무교육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받을 수 없어도 할 수 없다는 기묘한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향후 재일 외국인의 모든 아이들이 등교거부등을 일으키면, 학교측은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기는 커녕, 퇴학시키면 일이 해결된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의 중요성을 매스컴, 저널리스트의 대부분이 무시하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조묘 교수 대표 저서

고대사부터 근세 초기까지 500페이지에 걸쳐 역사를 정리한 대표작『韓国의 역사와 安東権氏』(新幹社),『동東아시아民族史2』(공저,平凡社),『三国史記訳注』제4권 담당(平凡社),『韓国・朝鮮を知るための55章』(공저,明石書店)등 다수.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대학, 본지 문화칼럼니스트) press2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