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2023 산조대전에서 만난 두 명인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2023 산조대전에서 만난 두 명인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03.29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2023 산조대전이 잘 끝났다. (3.9~26. 서울돈화문국악당) 2주에 걸쳐서 젊은 연주가와 중견 연주가의 산조를 들었다. 마지막 주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인 여덟 분의 산조가 마치 아름다운 꿈처럼 날마다 이어졌다. 산조대전의 올해 키워드는 성음! 산조는 ’태생 자체가 창작과 연주가 한 몸‘이나 세밀히 따져보면 ’가락(창작)보다 성음(연주)이 좀 더 우위에 있다‘는 게, 허윤정 예술감독은 지론이다. 

산조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자네는 성음이 좋네’란 찬사다. 가락, 장단, 음색이 조성(調性)과 잘 맞고, 악기 특유의 시김새(표현법)를 살리면서 이면(裏面)까지 잘 그려내야 비로소 성음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성음의 터득 없이 결코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산조대전의 마지막 주는 특히 성음의 진가를 확인하는 축제였다. 여기선 지성자명인과 박대성명인의 산조를 거론하겠다. (3.25) 두 분은 현재 지방문화재이다. 각각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보유자,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아쟁산조’ 보유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두 분은 일본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지성자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서 일본에서 활동했고, 박대성은 1990년대 일본에 거주했다. 명창명인이 해외공연을 많이 다닌다지만, 반면 한 지역에서 오래도록 거주하면서 거기서 산조의 뿌리를 내리는 일은 드문 편이다. 따라서 두 분의 연주는 디아스포라라는 개념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악보보다 성음, 가락보다 성음 

지성자는 오래도록 일본 최고 국립예술대학인 도쿄예대(東京藝大)에서 가야금을 오래 가르치면서, 일본의 유수 공연장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면서 연주를 했다. 반면 박대성은 그렇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무대가 아닐지라도, 박대성의 연주는 늘 감동을 주었다. 

‘알아야’ 산조를 즐길 수 있다 하는데, ‘몰라도’ 감동을 주는 게 박대성의 아쟁산조다. 자이니치(재일 코리언)와 일본인을 굳이 구분 지을 수 없이, 그가 아쟁의 줄을 활대로 켜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거의 모두 빨려들게 된다. 왜 그럴까? 박대성의 산조에는 성음이 살아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청중에게 바로 고스란히 전달되기에 그렇다. 박대성의 아쟁을 들으면, 앞선 세대 국악인 강조했던 ‘가락보다 성음’이란 말에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이번 돈화문국악당에서도 아쟁이란 악기의 매력이 박대성의 성음을 통해서 찬란히 빛을 발하는 순간을 경험했다. 

지성자가 오래 전 도쿄예대에서 가야금강사 초빙하려 할 때, 걱정이 앞섰단다. 자신은 산조를 악보로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대학에선 악보를 매개로 해서, 예술교육이 이뤄지기에 그러했다. 이렇게 걱정을 할 때, 도쿄예대의 교수인 민속음악학자 고이즈미 후미오(1927-1983)는 오히려 그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악보로만 교육할 때 느끼기 어려운, 가야금특유의 성음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기에 그렇다. 

요즘 돌아보면, 산조를 잘 타는 젊은 연주가들이 많다. 그러나 그게 감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왤까? 산조를 너무 ‘기교의 집합체’로 보는 건 아닐까? 기술적 측면에서 나무랄 때 없지만, 공감적 측면에선 느껴지지 않는다. 악보를 통해서 외우며 익힌 산조에선, 저마다 개성적 표현력과 존재적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받아들인’ 젊은 연주가들이, 두 명인의 산조를 들으면서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낀’ 산조가 어떤 것인가를 잘 알게 되길 바란다. 

지성자의 단단함, 박대성의 칼칼함 

요즘 일부 젊은이의 가야금산조는 너무 쟁쟁거린다. 부딪는 소리만 있다. 퍼져가는 성음이 아쉽다. 줄을 통해서 만들어낸 가락이 가야금의 공명통을 통해서 흡족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뜯기는 하되, 울리지 않는다. 때때로 산조가 너무 건조한 느낌인데, 그걸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요즘 일부 젊은이의 아쟁산조는 너무 벙벙거린다. 퍼지는 소리만 있다. 모이는 성음이 아쉽다. 
목욕탕에서 아쟁을 듣는 기분이다. 가야금과 오히려 반대로, 아쟁의 줄울림은 간과되고, 통울림만 과장되게 들린다. 아쟁산조가 너무 음습(陰濕)하게 들리는데, 그런 걸 잘한다고 여기는 게 문제다. 

왜 쟁쟁대기만 할까? 왜 벙벙하기만 할까? 현악기는 결국 줄과 통의 조화인데, 이 둘의 상생(相生)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야금처럼 뜯는 악기는 ‘통소리의 풍성함’이 중요하고, 아쟁처럼 켜는 악기는 ‘줄소리의 선명함’이 중요하다. 지성자명인과 박대성 명인의 연주를 듣고 또 들어보라. 가야금의 단단한 성음과 아쟁의 칼칼한 성음을 제대로 터득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