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창신동·숭인동을 거쳐 간 사람들
[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창신동·숭인동을 거쳐 간 사람들
  • 황현탁 작가
  • 승인 2023.03.2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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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창신동, 숭인동에는 우리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인물들이 짧게는 수 년, 길게는 60년 넘게 그 지역에서 머물렀다. 더하여 이름 모를 수많은 공순이·공돌이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생에서의 삶을 마감한 이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찰도 몇 있다.

▲영조글씨현판이걸린비각 ⓒ황현탁
▲영조글씨현판이걸린비각 ⓒ황현탁

첫 번째 인물이 제6대 단종(1441~1457)의 배필이었던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다.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단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재위 3년 2개월 만에 삼촌인 세조에게 양위한다. 1456년 단종복위를 도모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상왕(上王)이었던 단종은 이듬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결국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자주동샘과 바위각자
▲자주동샘과 바위각자 ⓒ황현탁

정순왕후는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에서 단종과 이별한 후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궁궐의 나인들이 궁을 떠난 후 삶을 의탁하고 있던 청룡사(靑龍寺) 옆의 정업원(淨業院)에서 기거하게 된다. 영조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웠으며(1771년), 비각에는 ‘앞 봉우리와 뒷 바위 천만년을 가다(前峯後巖於千萬年)’란 영조가 쓴 문구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비우당과 여담재
▲비우당과 여담재 ⓒ황현탁

정순왕후는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지은 집(英嬪亭)과 보내는 식재료도 거부한 채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동망봉(東望峯) 언덕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옷감에 물을 들여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다 내다팔면서 64년간 애닳고 한 많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언덕에 흐르는 샘물에서 옷감을 빨아 자줏물을 들였는데, 그 샘 주변에는 자줏물이 나는 자지초(紫芝草)가 많았다고 한다. 옷감을 말리던 바위에는 자지동샘(紫芝洞泉)이라고 새겨져 있다.

▲백남준 기념관
▲백남준 기념관 ⓒ황현탁

지금은 그 바위 앞에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의 초가집 비우당(庇雨堂)이 복원되어 있고, 옆에는 여성운동사를 홍보하는, 고대광실의 여담재가 세워져 있다. 그녀가 올랐던 언덕(숭인근린공원)에는 동망각과 동망정을 세우고, 그녀의 일생을 다룬 후대의 연극, 영화, 소설 등 작품을 기록해 놓은 기억의 벽까지 만들어 놓았다.

▲봉제공정 4단계
▲봉제공정 4단계  ⓒ황현탁

창신동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선대가 살았던 곳이기도 한데, 좁게 나뉘어 개인에게 이전되었던 부지중 일부를 서울시가 매입하여 2017년 백남준 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는 세계문예사조에 미친 그의 업적을 기록해 놓고, 뉴욕스튜디오를 재현(복제품)해 놓았다. 독립운동가 김상옥은 동대문역 6번 출구 KFC점포인근, 근대미술가 박수근은 동묘역 6번 출구 전방 도로변, 가수 배호는 동묘역 9번 출구 전방 골목, 가수 김광석은 창신동 안양암 인근 도로변에 살기도 하였는데, 제대로 된 표석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봉제거리  ⓒ황현탁

한국전쟁 후 동대문인근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하였으며, 1958년 청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이들이 평화시장 및 동신시장(1962), 통일상가(1968), 동평화시장(1969) 등에서 의류의 제조와 판매에 종사하자 창신동은 이들 의류시장의 배후공장으로 변한다. 밀리오레와 두타(1998) 등 대형 쇼핑몰이 건립되면서 2002년에는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로 지정된다. 하루 만에 주문, 생산, 배송까지 가능한 대규모 의류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제일 큰 의류제조기지로 발돋움하였다.

▲산마루카페에서 필자  ⓒ황현탁

‘이음피움봉제역사관’ 설명에 따르면, 최전성기에는 3,000개 이상의 봉제공장이 불철주야 뛰었고, 오늘날에도 900여개의 봉제공장이 영업 중이라 한다. 일부지역에서 재건축이 추진되어 봉제역사관도 곧 문을 닫고, 인건비가 싼 해외로 주문이 이전되어 상당수 봉제공장이 폐업해야할 처지란다. 의류골목 여러 건물 벽에 기록해 놓은 봉제용어, 의류공정 생산단계, 봉제공장의 24시간, 거리의 주인공들 이름 등 창신동의 봉제거리가 그야말로 ‘역사’로 남을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단보조사로 일하다 열악한 근로환경 개선을 촉구하다 삶을 마감한 전태일 재단(財團)도 봉제거리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청룡사우화루, 단종과정순왕후가 만난곳
▲청룡사우화루, 단종과 정순왕후가 만난곳 ⓒ황현탁

일제가 서울의 정주시설을 본격적으로 건설하자, 창신동 낙산과 숭인동 동망산 바위를 폭파해 석재로 사용하였다. 조선은행본점(한국은행), 경성역(서울역), 경성부청(서울시청), 조선총독부(중앙청) 등에 쓰인 돌이 그곳 채석장 돌이다. 채석이 중단되자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주택 뒤에 높다란 절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등성이에는 절개지나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나 음식점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으며, 체육시설, 놀이시설, 휴게시설 등을 갖추어 놓았다.

그 지역에는 고려 태조 때(922) 창건된 비구니들의 도량이자 단종이 유배를 떠날 때 정순왕후를 만났다는 청룡사가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든 관음보살상을 모신 안양암(安養庵)도 있다. 또 황실의 내탕금(內帑金)으로 창건된, 조선 전체의 사찰을 총괄하는 총본산 원흥사(元興寺)도 있었다. 1906년 원흥사에 명진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중앙학림-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로 이어진다. 한일병탄 이후 원흥사의 책임자가 바뀌고 기능이 각황사(현 조계사)로 이관된다. 창신초등학교 담벼락의 짧은 기록만이 지난 시절을 환기하고 있을 뿐이다.

▲안양암마애관음보살좌상
▲안양암마애관음보살좌상 ⓒ황현탁

창신동, 숭인동은 동대문에 인접한 지역이어서 사연이 많기도 하지만, 바위가 건축 재료가 되고, 의류산업 상권이 형성되어 자연스런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많은 산동네가 아파트촌으로 변하였는데, 그곳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 봉제역사관도 곧 문을 닫을 것이란다. 그 지역에서 성업 중인 베트남, 네팔의 음식점이나 환전소, 종로통을 경계로 남쪽의 문구·완구나 액세서리, 잡동사니 가게들 역시 변화의 물결을 맞이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의 섭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저 순응하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