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유니버설발레단의 ‘코리아 이모션 - 情’
[이근수의 무용평론]유니버설발레단의 ‘코리아 이모션 - 情’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3.2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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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감정보다 한국적 고유성을 찾아내야 할 숙제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한국인이 느끼는 ‘정(情)’이란 말에 가장 근사한 영어 단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단순한 감정이라고 보면 필링(feeling)이나 센티먼트(sentiment)란 단어가 있고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보면 러브(love), 정신적 사랑이란 면에서 보면 어펙션(affection)이 가깝다. 사람이 느끼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哀惡慾)’의 모든 감정을 한 단어로 집약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말 ‘정’의 독특한 매력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이 2023년 정기 공연을 준비하면서 ‘정(情)’을 ‘Korea Emotion’으로 번역했다. 서양인들이 느끼는 분석적인 감정과 차별화돼 있으면서 한국인만이 느끼는 정서 혹은 한국에 특화된 정서를 대변하는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마도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심청(沈淸)’, ‘춘향(春香)’등 전통적 소재를 발레 작품으로 창작하면서 창단 시부터 유니버설발레단이 지향해온 K-ballet 와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병헌이 안무한 ‘코리아 이모션-情’(3.17~19, 해오름극장)은 9개 소품으로 구성된다. 2021년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에 초청된 유니버설발레단이 공연한 ‘트리플 빌’의 개정판이다. 초연 시의 세 가지 주제였던 ‘분(憤)∙애(愛)∙정(情)’ 중에서 ‘정’을 표현한 25분 작품을 65분 작품으로 확장한 것이다. ‘미리내 길’, ‘비연’, ‘달빛 영’, ‘강원, 정선아리랑’ 등 본래의 4 작품에 ‘동해 랩소디’, ‘달빛 유희’, ‘찬비가’, ‘다솜 1’과 ‘다솜 2’, 등 다섯을 더해 'Korea Emotion-정‘을 완성했다. ‘동해 랩소디’는 단풍으로 붉게 물든 가을 산을 배경으로 남녀 여덟쌍이 등장하여 역동적인 춤을 춘다. 한복을 개량한 간편한 남녀의상이 로맨틱한 발레 의상을 떠올려준다. 발레리나 넷이 가야금과 아쟁 선율에 따라 춤추는 ’달빛 유희‘는 지상으로 쏟아질 듯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매혹적인 춤이다. 

이어지는 ‘찬비(cold rain)가’는 남성 4인무다. 발레리노 넷은 각각 손에 부채를 들었다. 여인들의 부채춤이 아니라 선비들이 야연에서 시상(詩想)을 주고받으며 삶의 멋을 표현하는 듯한 남성 부채춤이 한량무를 연상시킨다. 배경은 조명이 찬란하게 밝혀진 도시 야경이다. 화려하게 피어난 목단꽃과 거친 암벽을 배경으로 추어지는 다음 두 개의 춤은 각각 여성 2인무와 남성 2인무다. 제목의 ‘다솜’은 ‘사랑’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다. 부자지간 혹은 형제간의 정과 모녀의 정을 간절하게 그려낸 춤이다. 

남녀 듀엣으로 펼쳐지는 ‘미리내 길’과 ‘달빛 영(朠)’은 먼저 세상을 떠나간 지아비와 아내를 그리워하는 아내와 남편의 슬픈 사모곡이다. 적막한 밤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보름달이 교교하게 지상을 비춘다. '비연(悲戀)'은 남녀 네 커플이 등장하는 사모의 춤이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산맥들이 연봉을 이루며 펼쳐진 배경영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은유한다. 먼동이 터오고 있다. 아홉 쌍을 이루는 18명 출연자 모두가 등장해서 국악과 클래식, 성악이 어우러진 음악과 함께 군무의 향연을 보여준 ‘강원, 정선아리랑’이 사랑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대미를 장식한다. 

K-ballet 창작에서 한국적 소재와 함께 의상과 소도구, 국악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지평권의 국악 크로스오버 앨범 <울트라프로젝트>에서 4곡, 국악 연주그룹 앙상블시나위의 앨범에서 세 곡을 원곡 이름 그대로 차용하여 소품의 제목을 삼았고 강은일(해금), 권송희(국악), 신델라(소프라노), 정주희(판소리)가 참여했다. 

사랑과 이별은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다. 9개 소품의 절반 이상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쉽다. 시부모를 모시는 한국 며느리, 시골 경조사 때 펼쳐지는 마을잔치, ‘마음보다 몸을 먼저 파는 일본기생과 달리 몸보다 마음을 먼저 판다는 한국 기생’(박경리 ‘토지’ 중에서)의 정서 등은 서양과 다르고 중국이나 일본과도 차별화된 한국만의 고유한 정이다. 

인정이 사라지고 휴머니즘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에 고유의 정을 찾아내고 그 가치의 중요함을 환기하려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기획 의도는 소중하다. 본래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한국 고유의 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코리아 이모션-情’이 ‘심청’, ‘춘향’과 함께 유니버설발레단을 대표하는 K-ballet의 삼총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