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평론계의 태동기 2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평론계의 태동기 2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3.04.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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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비록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1년 반 독일어 교사로 있으면서 후배이기도 한 제자들을 가르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 생활은 은사님들 속에서 여전히 보호받는 따듯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생활이었다. 나 또한 그러한 느낌으로 행복한 생활을 하다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 독일정부장학금은 1년이란 한정된 시간이었고 때문에 나는 매우 불확실한 시간설정을 하고 간 유학길이었다. 때문에 사회생활의 냉혹함은 경험하지 못한 채 매우 유복한 유학생활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귀국하여 이화여대 독문과 전임강사부터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은 사회인으로의 초년생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의 아니게 좌충우돌하며 서툰 사회생활을 한듯하다. 돌아보면 선배님들에게 본의 아니게 당돌한 후배이기도 한듯하다. 하지만 그만큼 단순한 사람이었기에 좌충우돌하면서도 그게 좌충우돌인지도 모르면서 내 맡은 일은 열중했던 듯싶다.

어찌했던 나의 단순한 성격 때문에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의 연극담당교수로 17개나 되는 연극, 그것도 현대연극의 초석이 될만한 연극들을 매년 1편씩 올리면서 한국연극계에 서양연극의 새로운 바람인 <번역극의 기반이 될만한 작품> 들을 골라 무대에 올렸다.

다행히 한국연극계에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유덕형, 유인형, 안민수 등 새로운 인력들이 연극바람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고, 한국연극의 뿌리와 언어의 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오태석의 공연이 대학가 중심에서 대중의 관심을 열기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김의경의 실험극장의 바람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러한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대중들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더불어 무용계에도 퍼져나갔으며, 한동안 조용하던 미술계에도 불어닥쳤다. 하지만 70년대 중후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예숣평론계에는 우선 연극평론쪽의 이상일, 이태주, 한상철 등을 중심으로 활발해지며 서울극평가 그룹을 조직하여 신문에 원고지 4,5매를 넘지 않는 연극평론을 싣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일보가 처음 연극평론에 지면을 열어주었던 듯하다.

무용평론가로는 이순열, 김영태, 두 분이 제일 적극적이셨고, 국악과 전통 분야에는 <비목>의 작사자로 더 잘 알려지며 국악원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여 많은 일을 하신 한명희 님이 계셨다. 미술평론가로 공연분야의 평론가와 잘 어울리셨던 분은 이구열 선생님이셨다. 연극, 무용, 미술, 국악 등 각 분야에 글을 쓰시던 평론가들은 필자인 양혜숙을 위시하여 30대 후반의 나이나 40대 초반의 나이로 자주 어울리기도 했다. 각기 자신의 분야 예술계의 문제점들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그 문제점들의 해결방향도 심도있게 논의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요순시절의 순수한 모습들이었다.

그 후 연극평론 쪽에는 혜성처럼 각광을 받은 김방옥님, 김문환님, 언론계에서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이며 배우들의 후원자로 알려진 구희서 님의 역할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극평론의 활발한 역할은 당시 주간조선이 주마다 출간되면서 한국연극평론계에 20매에 준하는 지면을 할애해 줌으로써 비로소 평론다운 평론을 펼쳐가게 된다. 또한 평론의 획기적인 발전의 시발이 되며 비로소 양혜숙도 연극평론다운 평론을 펼치게 된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공적 단체 출발점

 

한편 인사동을 중심으로 자주 만나며 모임을 갖게 된 평론가들은 각 분야의 문제점을 열린 마음으로 논의하면서, 88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예술평론협의회를 결성하는 바탕이 된다. 그리하여 유신 음악평론가가 제1회 회장을 맡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국에서 문학분야 담당관으로 재직하시던 최일수 선생님이 부회장 겸 사무국을 맡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일을 진행해 오셨다. 영화분야는 변인식 회장이 맡아 긴 시간 동안 봉사 하셨고 문학, 영화, 연극, 미술, 음악, 무용 등 6개 분야가 중심이 되어. 발전한 열의적 분위기는 1988년 한. 중 예술평론심포지엄을 시작으로 베이징, 연변, 상해 등 3곳에서 <예술평론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매우 큰 호응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유신 회장님, 최일수 부회장님, 김인환 미술평론가, 양혜숙 연극평론가 등 6명은 한국 예술평론의 당시 현황과 문제점을 중국 등의 대표들과 토론 논의하므로 해서 서로의 상황을 처음으로 교환하게 되었다. 커다란 깨달음은 중국의 문화혁명의 진행이 중국문화와 인성의 파괴가 얼마나 큰 문화와 인류의 손실인가를 역력히 보고 왔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1988년도 한. 중 예술평론심포지엄을 통해 2가지 큰 행운과 혜안을 얻게 되었다. 첫 번째로 나는 중국 땅이 그렇게 광활하며, 두 번째로 백두산은 대단한 명산이며, 천지의 정기가 우리 한민족의 맑은 심성의 근원임을 처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였다. 만주의 정기는 우리 한민족에게는 절대로 낯선 정기가 아니며 그 친근함과 넉넉함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피 속에 흘러내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연극평론가로의 긍지를 느끼는 최초의 경험이었으며 연극평론가를 키워 후배들의 눈과 귀가 더 보배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연극평론가 그룹을 해체 확대하여 한국연극평론가협회로 확대 구성하여 처음으로 아카데믹 평론에 쏠려있던 평론의 시야를 넓혀 저널리스틱 평론가로 정중헌을 영입했다. 처음으로, 선출된 이사들로 구성하여 사적인 그룹이 아닌 공적이며 균형있는, 명실공히 공적인 단체로 탈바꿈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최초의 한국연극평론가 협회 회장은 고대영문과 교수를 막 은퇴하시게 된 여석기 교수님이 선출되었다. 이사로는 (존칭을 생략한)이상일, 이태주, 한상철, 양혜숙, 김문환, 구희서 등으로 조직을 완료해 오늘의 한국 연극평론가 협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 해부터 한국연극평론워크샵이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이 모든 행사는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금의 <예술가의 집>에서 진행되었음을 일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