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옆에서>에 대한 잘못된 평가들 (2)
<국화 옆에서>에 대한 잘못된 평가들 (2)
  •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2.08 1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쩍새의 울음'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지난호에 이어)

<국화 옆에서>의 제1연에서부터 그런 생명의 존엄성 운운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를 보자.

이 시를 읽으면 일단은 아름다운 국화꽃이 그려진다. 그 꽃은 가녀린 새의 슬픈 울음소리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아름답기는 하지만 슬픔을 간직한 꽃이다. 화려한 장미나 모란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슬픔을 간직한 꽃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바르게 해석하고 논리적 사고력과 상상적 사고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이 시속에 그려진 아름다운 국화 꽃밭의 풍경은 착각을 유도하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국화 종목에 속하더라도 시골 길가에서 만난 국화와 장례식장의 국화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그려진 국화는 모양도 다르겠지만 느낌도 다르다. 그처럼 모든 단어는 그것이 쓰인 장소와 시기와 이유와 방법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물론 문학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렇지만 이를 공표하고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작자와 독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작자는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쓰고 발표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발표작은 만인에게 바르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시도 언어 예술이다. 언어를 표현 매체로 삼으니까 언어예술이다. 그리고 시인은 거기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일반인은 따르기 어려운 전문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섬세한 감각 없이는 단 한 개의 단어라도 함부로 남용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서정주는 그런 의미에서 남달리 언어예술의 기법에 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입장에서 제1연에서는 중심 소재가 되고 있는 '국화'와 '소쩍새'의 정확한 의미부터 바르게 해석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실인지를 봐야 한다.

이 해석이 내려진 것은 국화꽃이 그냥 쉽게 피어난 것이 아니라 매우 어렵게 피어났다는 개화 과정에 대한 설명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울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생명이라도 매우 힘든 노력의 결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보편적 진리를 서정주가 나타냈다는 것이다. 김현승의 해석도 그것이고 다른 교수의 불교적 인연설도 그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생명 존중 사상이라면 이런 식의 존엄성 부여부터가 엉터리다. 정당한 주장이 될 수 없다. 힘들게 태어나지 않고 산모가 어떤 고통도 받은 일 없이 호강만 하다가 최고급 의료원에서 무통 분만 했더라도, 또는 철없는 쾌락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에 불과하더라도, 또는 강간 살인범에 의해 태어났더라도 생명은 다 같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생명 존중 사상이다. 여기에 그 생명이 얼마나 어렵게 태어난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존중해야한다는 참된 생명정신에 위배된다.

<국화 옆에서> 제1연도 국화꽃이 얼마나 어렵게 피어난 것인가 하는 과정 설명이다. 국화꽃이 그냥 쉽게 핀 것이 아니라 봄부터 그렇게 소쩍새가 울었기 때문에 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렇게 소쩍새가 봄부터 밤마다 울지 않고 쉽게 피었다면 국화꽃의 존엄성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사실은 생명의 존엄성이란 평가도 많은 문인과 교수들이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이지 서정주 자신이 밝힌 주장도 아니다. 시의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다. 한 송이 국화꽃이 힘들게 피어났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힘들게 탄생하는 모든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휴머니즘이나 불교적 생명 사상은 서정주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오히려 서정주는 그런 생명들은 모두 하잘 것 없는 것들로서 짓밟아버려도 좋다는 주장이다. 그런 짓밟기의 과감하고 힘든 과정을 통해서 피어나게 될 단 하나의 생명인 '한 송이 국화 꽃'만을 그는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소쩍새의 울음'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국화꽃을 피게 한 어떤 과정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힘든 과정인 것도 인정된다. 봄부터 늦가을 서리 내릴 때까지 밤마다 울었다면 소쩍새들도 참으로 힘들었을 터이니까.
그렇지만 탄생을 축하하고 그 존엄성이 인정되려면 힘들었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노력 자체가 존엄해야 한다. 고귀한 정신이 스며 있는 노력이어야 한다.

힘든 것은 많다. <죄와 벌>에서 라스코리니코프가 전당포집 노파와 그 조카를 죽인 것도 대단히 힘든 살인이었고 그 때문에 그는 살인 후 열병환자처럼 신음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행위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 때문에 살인이 미화되거나 정당화 될 수 없고, 그 결과로 전당포 집에서 들고 나간 장물들이 미화되고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을 미화하고 정당화한 것은 라스코리니코프 자신뿐이었다. 서정주도 이런 라스코리니코프와 같은 유치한 논리를 그의 친일 시에 도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