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의자왕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면
[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의자왕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면
  • 황현탁 작가
  • 승인 2023.05.1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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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부족했던 점 오늘날 교훈돼야
▲황현탁 작가
▲황현탁 작가

“떨어지는 궁녀의 그 어느 치맛자락을 잡고 의자왕이 백마강의 수혼(水魂)이 되었다면 오늘의 낙화암은 그 뜻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45년 전인 1977년 4월 선친(先親)이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의 낙화암을 찾은 후 읊은 소감이다.(등포 황영기에세이 《아쉽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 2015, 263쪽) 

백제가 멸망하자 의자왕은 적국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서 객사(客死)한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국사에 매진해도 나당연합의 세파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시되던 시대상황에서 수많은 궁녀들과 환락을 즐겼음은 부소산의 궁녀들 사당인 궁녀사와 추모각인 백화정이 그 실상을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당나라 소정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 왕과 왕자, 관리와 왕족 7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음을 기록해 놓았다. 의자왕은 압송되던 해인 서기 660년 그곳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를 모셨던 삼천궁녀는 나라와 임금 잃은 설움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꽃다운 청춘을 버렸다. 의자왕이 자신의 실정(失政)을 자책하였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선친은 그를 섬겼던 삼천궁녀가 지조와 절개를 지켰듯이 그 역시 수혼의 길을 택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우들과 함께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를 찾아 정림사지·궁남지와 함께 부소산의 백화정·낙화암과 고란사를 찾았다. 이번 부여탐방은 오래 전 선친께서 둘러보았던 길을 뒤따르는 형국이 되었다. 그 당시 정림사지는 허수름했을 터이지만,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유적지구’를 위한 정비 덕분에 너무나도 가지런했다. 또 허허벌판에 앉아 있던 보물 ‘석조여래좌상’ 역시 1993년에 지은 보호각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정림사지박물관까지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철책너머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보고도 입구까지 되돌아가 타도록 만든 관리자들의 심술은 ‘옥의 티’였다.

부소산정상 쪽을 오르지 않아 45년 전 선친 여행기에서 언급되었던 궁녀사·군창지·삼충사·영일루·사자루 등은 보지 못했다. 구드레나루에서 황포돗배를 타고 고란사나루에 내려, 백화정과 낙화암, 고란사를 둘러보았다. 선친께서 친구와 촬영을 위해 앉았던 백화정 바위는  그대로인 것 같았으나 주변을 정비하여 도저히 당시의 장면은 연출할 수 없었다. 낙화암으로 내려가니 보호철책을 만들어 놓아 위험하지는 않았으며, 수풀 때문에 절벽은 보이지 않았다. 백마강 유람선 뱃전에서는 송시열이 썼다는 ‘낙화암’의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과 왕자, 대신과 백성 등 12,895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의자왕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면, 수많은 백제인이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사치와 환락이란 불명예 역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보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그의 또 다른 실정, 즉 ‘요망한 계집을 믿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에게 벌을 주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신임을 얻는’, 요즈음 표현으로 ‘여인에 의한 국정농단’이란 당나라의 평가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논산 관촉사에는 반야루를 오르는 계단 왼편에 1965년 대한반공청년회 논산군지부에서 세운 ‘우남이승만박사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조국과 동포를 위한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심’을 애도하는 이 비에는 ‘포로석방의 영단으로 조국의 품에 안긴 저희들’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다. 선친 역시 6.25전쟁 당시 피난을 떠났다가 UN군의 포로가 되어 1952년 거제도에서 석방되었다. 아버지의 고향 귀환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이다. 이 비를 마주한 것 역시 내 탄생의 내막을 다시금 소환하였다.

비록 아득한 옛날이기는 하지만 왕조가 700여년 유지되었다는 것 자체는 왕과 신하들의 나라와 백성을 위한 치국(治國)노력이 사뭇 진지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멸망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승자도 아니고 남아있는 기록도 없지만 통치자와 지배계급,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 똘똘 뭉치지 못한 사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왕과 왕족들의 사치와 무모함뿐만 아니라, 백제 왕실의 내불당(內佛堂) 기능을 하였다는 고란사와 스님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요새와 병사들의 준비태세 등 여러 면에서 부실·부족한 면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탈리아는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으로 오늘날 떵떵거리며 산다고들 한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나 부여,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역시 조상들이 남긴 유산이 많으나, 그  자체만으로는 지역주민들, 나아가 나라 전체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더 많이 찾고 돈을 쓰도록 하는 유인요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난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조그만 틈새라도 지나치지 않고 달리 생각해 앞으로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는 있다. 망국의 실정을 자책하는 임금, 사치와 음란을 질타하는 스님, 왕자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왕실여인에 의한 국정개입을 간언하는 신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 등 지난 역사에 부족했던 점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강한 나라, 걱정 없는 백성이란 염원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고란사의 약수를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몇 번 들이켰으니 수 삼년은 보장될 것이란 개인적 희망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