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서산박첨지놀이의 전승 의의
[성기숙의 문화읽기]서산박첨지놀이의 전승 의의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5.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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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35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대학원 재학시절 서산박첨지놀를 처음 접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자 한국무용민속학의 권위자 정병호 선생님 문하에 입문한 것이 계기였다. 학기 초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시어 충남 서산이라 답했다. 무척 반기셨다.

선생은 대뜸 서산 음암면 탑곡리에 전승되고 있는 박첨지놀이 얘기를 꺼내셨다. 서산박첨지놀이의 특징과 희소적 가치에 대해 한참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이 새삼스럽다. 정병호 선생과  사제의 연을 맺으면서 서산박첨지놀이와도 인연의 끈이 닿게 되었다. 

정병호 선생은 1980년대 초중반 탑곡리 마을을 현지조사한 적이 있다. 정병호 선생의 주문으로 1988에서 1990년경까지 음암면 탑곡리 마을회관에서 주연산, 김동익 두 어른을 여러 차례 증언채록했다. 서산이 고향이라는 이유로 선생은 박첨지놀이 보충조사를 내게 맡긴 것이다. 정확하게는 민속예능에 대한 현지조사 방법론을 터득하라고 훈련시키신 것과 다름없다. 

반추컨대, 선생은 증언채록에 대한 실제 방법을 비롯 인터뷰 내용의 녹음과 채록하는 법을 꼼꼼히 일러주셨다. 선생에 이어 고향에 전승되는 박첨지놀이를 현지조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1990년대 이후 서산박첨지놀이는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문학자 서연호 교수가 관심을 가진 바 있고, 민속인형극 연구의 권위자 허용호에 의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다.

몇 해 전 내포제 전통가무악을 발굴 조명하는 행사인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 일환으로 박첨지놀이가 전승되는 음암면 탑곡리 마을에서 공연을 개최했다. 내포 출신 전통가무악의 명인 한성준의 예맥을 잇는 서울의 춤꾼들과 서산지역의 젊은 연행자들이 함께 꾸민 무대였다. 지역 주민들의 주목도가 높았다.

주지하듯, 서산박첨지놀이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소급된다. 그러나 이는 속설에 불과하고 확증할만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 남사당패 출신 유영춘이 탑곡리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놀이를 주재하고 있던 주연산과 함께 현행 박첨지놀이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승과정에서 굴곡도 겪었다. 박첨지놀이는 일제강점기 잠시 중단되었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전승의 활로가 생겼다. 그후 주연산에 의해 연행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김동익이 주연산에게 박첨놀이를 배워 맥을 이었다. 차츰 마을사람들이 연행에 참여하면서 마을놀이 성격으로 변모했다. 

서산박첨지놀이는 주로 농한기나 추석명절에 연행되었다. 전승지역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기 때문이다. 과거엔 박첨지놀이가 열린다는 소문이 나면 인근뿐만 아니라 멀리에서까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박첨지놀이는 가부장적이고 퇴폐적인 양반사회의 모순을 풍자와 해학을 곁들여 표현한 인형놀이이다. 서민층에서 즐겨 연행된 민속극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 홍동지놀음, 꼭두박첨지놀음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인형을 매체로 한 사회풍자극인 서산박첨지놀이의 ‘박’은 인형을 바가지로 만들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첨지’는 벼슬 이름으로 양반을 해학적으로 풍자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전문예인 아닌 주민참여 
고유성·향토성 돋보여

서산박첨지놀이는 크게 3마당 4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마당은 박첨지놀이로 ‘유람거리’, ‘살림 나누는 거리’로 구성된다. 허름한 초로의 노인 박첨지가 큰 마누라를 집에 두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작은 마누라를 얻게 된다. 박첨지가 유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 사이에 곤욕을 치룬다는 내용이다. 고민 끝에 두 사람에게 모두 살림을 나눠 주는데 작은 마누라에게 더 후하게 줌으로써 마을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처첩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으며, 봉건적 가부장제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둘째마당은 ‘평안감사마당’이다. 매사냥거리, 상여거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력의 상징으로 인식된 평양감사가 민생을 멀리하고 매사냥에 정신이 팔려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꿩고기를 잘못 먹어 죽게 되어 상여가 나가는데 그의 아들들까지도 체통을 지키지 못해 망신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마당은 ‘절 짓는 마당’이다. 민중의식이 잘 투영된 과장이라 할 수 있다. 시주를 걷어 ‘공중사’라는 절을 짓고 눈먼 소경을 비롯하여 불우한 백성들은 물론이요 삼라만상 뭇 중생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승되고 있는 민속인형극으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의 하나인 꼭두각시놀음과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등이 손꼽힌다. 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유일한 그림자 인형극이라 불리는 만석중놀이가 있다. 

박첨지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서산 음암면 탑곡리 마을은 멀리 가야산을 병풍삼고 있다. 저수지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은 천혜의 요새와 다름없다. 또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서산박첨지놀이는 특별하다. 전문예인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 박첨지놀이 연행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만큼 고유성과 향토성이 돋보인다.  

알다시피, 서산박첨지놀이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1세대 연행자 대부분은 작고했다. 주연산의 외손자 이태수가 그 맥을 잇고 있다. 그는 현재 서산박첨지놀이 전수조교이자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연행자의 경우,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박첨지놀이 연행자 대부분은 순수 마을 주민들로서 70~80대 고령의 나이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이태수 회장의 어깨가 무겁다. 한편, 전승환경의 급속한 변화는 박첨지놀이 전승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전통의 올바른 보존과 무형유산적 가치의 지속을 위한 창의적 방안이 보다 다채롭게 모색되기를 기대한다.